9.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왔다. 긴 겨울 밤에 스피노자를 제대로 읽고 싶어서 그 어렵다는 책 <에티카>를 들고 혼자 끙끙 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지깽이 선생님이 김용규의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을 먼저 읽어보라고 권했다. 이 책은 아직 도서관에 도착하지 않았기에 우선 김용규의 <영화관 옆 철학카페>를 구해서 읽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자캐기 ...그 끝에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는 책도 딸려왔다. 보물섬이었다.
타르코프스키는 서방세계로 망명한 러시아의 감독이다. 그는 솔제니친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것이 전부인가? 아니다! 뒤이어 따라오는 - 타르코프스키가 그리도 사랑하던 - 초원에서 빗속을 거침없이 달리는 말의 연상, 곧 자유, 평화, 그리고 삶의 기쁨!”
타르코프스키는 솔제니친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래서 솔제니친은 이것을 보았을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보았다.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자유와 평화 또한 삶의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 가를!
“눈뜬” 믿음 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기 인격의 모험이 없다. ‘보지 않고도 믿는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관건이다.
이런 문장들에 감탄하면서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나갔다.
이 책에서 다루는 5개의 영화 중 오늘은 두편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 안드레이 루블료프
- 하르트만의 '신념'으로, 키에르케고르의 '믿음'으로
하르트만은 "충분한 근거, 또는 객관적인 확실성을 가진 눈뜬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기인격의 모험이 없다. 보지 않고도 믿는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관건이다"라고 했다. 같은 말을 키에르케고르는 "부조리의 힘으로 믿었다"라고 했다. 우리는 15세기 러시아 성화상(Icon) 화가인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생애를 다룬 이 작품에서 인간에게 신념이 무엇이고 믿음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본다.
** 솔라리스
-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하이데거의 '양심
하이데거는 양심을 불안 속에서 불안해하는 우리에게 자신의 본래적 자기에로 돌아가라고 '탓하는 부름'이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름의 소리는 오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안에서만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솔라리스>를 해석하면서 인간에게 시간이 무엇이고, 양심이 무엇인지를 본다. 나아가 스스로 이러한 양심의 부름을 듣길 원한다.
저자 김용규가 철학과 신학을 배경으로 책을 쓰고 이야기하는 방법은 독특하다. 그것은 디아트리베 ( DIATRIBE) 라는 수사법으로 사도 바울이 글을 쓰거나 설교를 할 때 즐겨 사용하던 방법이다. 즉 “기분풀이‘ 내지 ’환담‘이라는 뜻을 가진 디아트리베는 심오한 변론이나 사상도 전문용어를 사용해서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방법을 회피한다. 디아트리베는 비속하지만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그 내용을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독자나 청중을 대화의 상대로 끌어들이고 그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전개하는 수사법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재미있다. 철학과 신학이 마치 소설처럼 술술 읽히고 이해가 된다. 적어도 그가 설명을 해주는 범위 안에서는. 이 책이 마치 그와 카페에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기분풀이 수다를 떠는 것과 같지 않느냐고 그는 다시 내게 물어온다. 그렇다. 갑자기 그가 매우 친근하게 느껴지고 뭐든지 물어보면 그가 어렵게 배워 익힌 것을 모두 다 매우 친절하게 가르쳐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영화 잡지 “시네 21”의 애독자이다. 창간호부터 오늘까지 계속 정기구독 해오고 있다. 물론 내 이름으로 주문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 집으로 매주 배달된다. 이 잡지를 통해서 이진경, 진중권, 강유원 같은 매우 개성있는 책을 쓰는 작가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이 잡지를 아주 조금만 이해하고 있는 편이다. 대체로 내게는 아직 이 영화라는 종합예술을 이해하는 수준이 어린아이의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는듯, 나름 문화적 콤플렉스를 겪고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영화 세미나”에도 나가보고, 나름 영화책을 많이 집어들어 보고 영화제에도 가보고 국제 여성영화제에도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언제나 난 정말 무식하고 예술에 대한 이해에는 멀어도 한참 먼 곳에 서있구나..라는 통한만 남아 씁쓸히 되돌아오고는 했었다. 그러다가 지난 가을 미술사 강좌를 하나 들었다. 그리고 도상학에 대한 공부가 필요해졌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직관에 대한 느낌들을 좀 키워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만난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류블로프에 관한 영화는 참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은 사실, “철학을 위한 주제별 영화 강의”의 결과물이다. 먼저 2002년에 <영화관 옆 철학카페>라는 책이 나왔고 그후 2004년에 다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만을 뽑아 이 책을 간행했다. 물론 새로운 작품들이 추가되었다. 나는 “솔라리스”라는 영화의 시간 개념과 “루불료프”에 우선 관심이 갔다. 그래서 그 영화를 다 찾아서 보았다. 나의 신앙과 관련된 오랜 기억이 이 영화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하는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우리 집 대문 앞에는 이 루블료프가 그린 “삼위일체”라는 아이콘(성상화)이 있다. 이 그림은 구약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천사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그의 집을 방문한 세 천사를 극진히 대접한다. 그 손님들은 바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느님이었다. 나는 이 그림을 “나그네를 잘 대접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하며 집의 대문 앞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과 헨리 뉴엔이 이 아이콘을 묵상한 소책자들을 찾아 읽었다. 결국 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대한 김용규의 탁월한 해석을 읽고나니 이제야 그 퍼즐이 온전하게 맞추어진 것 같아서 기뻤다.
그 깨달음이 너무나 반가워서 우선 이 대목만 함께 나눈다. 공부라는 것이 정말 흙에 묻힌 감자 넝쿨을 걷어내는 것 같다. 하나를 알게되면 그 줄기에 이어진 감자 열매를 땅의 사과처럼 맛있게 먹을 수 있게되니 그 수확이 즐거워 또 책에 코를 파묻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책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삼독을 해야 하겠지.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또 나를 읽어내야지. 이 세 번째 과정이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고 구비구비 어려운 고비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