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 영감 대접

참 비 많이 내렸습니다. 호우, 폭우, 폭풍, 태풍…….

여름내 세차게 쏟아진 비는 교도소의 찌든 흙을 깨끗이 씻어놓았습니다. 본연의 풋풋한 흙내와 생기가 싱그럽습니다.

빗줄기로 드러난 잔돌, 물길에 패인 흙고랑, 그새 자라난 쇠비름, 가라지, 땅강아지, 베뿌장이…… 들은 이곳이 옥담 속에 갇히기 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햇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노닐고 이름 없는 잡초들도 뽑히지 않고 무성하게 살아가던 옛날 언덕의 시절을 보여줍니다.

바람과 비 다 보내고 나니 어느새 가을입니다. 담요 빨래도 해야지, 순화교육도 받아야지, 맡은 글씨도 써야지, 더위 핑계로 미뤄놓은 읽을거리도 많지……. 원체 짧은 옥중의 가을이 여름 뒤치닥거리와 겨울 앞채비로 나머지가 없습니다. 징역살이처럼 왜소한 삶도 그것을 영위하기 위한 일거리가 적지 않습니다.

한때 저한테 대학 다니는 굉장히 예쁜 딸이 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제가 구속되자 웬 젊은 여자가 어린 아기를 안고 와서 말없이 울기만 하다가 아기를 두고 갔다던가, 그 아기가 할머니 밑에서 자라서 지금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제법 그럴 듯한 내용입니다. 덕분(?)에 그 엉터리가 드러나기까지 한동안 젊은 친구들로부터 애교 있는 접근과 과분한 친절을 받았습니다. 흐뭇하면서도 섭섭한 일입니다. 제가 구속될 때의 나이 또래인 젊은 친구들로부터 장인 영감 대접이라니. 돌이켜보면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나무 없는 미도아파트, 그래도 가을은 올 테지요. 어떤 색깔인지 궁금하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