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靜勝躁 寒勝熱 淸靜爲天下正 ―제45장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이 장의 핵심적인 개념은 ‘대’大입니다. 대성大成·대영大盈·대직大直·대교大巧·대변大辯에서 알 수 있듯이 대는 최고의 개념입니다. 최고 수준, 최고 형태를 의미합니다. 성成·영盈·직直·교巧·변辯의 최고 형태는 그것의 반대물로 전화하고 있습니다. 곧 결缺·충沖·굴屈·졸拙·눌訥이 그것입니다. 변증법적 구조입니다. 질적 전환에 대한 담론입니다. 노자는 이러한 변증법적 논리를 통하여 사물에 대한 열린 관점을 제시합니다. 상투적이고 획일적인 형식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위를 배격하고 무위를 주장하는 노자의 당연한 논리입니다. 결론적으로 대大의 기준, 즉 최고最高의 기준은 ‘자연’입니다. 자연스러움이 최고의 형식이 되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형식에 대해서는 원초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노자입니다.
‘대성약결’大成若缺과 ‘대영약충’大盈若沖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겉으로는 별로 없는 듯이 차리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헙수룩하게 차려입어도 개의치 않지요. 많이 아는 사람도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지요. 의상의 경우에 대성大成의 경지, 즉 최고의 완성도는 잘 모르기는 하지만 아마 정장 차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자유롭고 헐렁한 코디네이션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왕필은 “사물에 맞춰서 채우되 아끼거나 자랑하지 않으므로 비어 있는 듯하다”고 주를 달아놓았습니다. 『장자』莊子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부어도 차지 않고 떠내어도 다하지 않는다(注焉而不滿 酌焉而不竭)는 것은 어떤 획일적 형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형식이 없는 경우에는 닳거나(弊), 다함(窮)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대직약굴’大直若屈에 대해서 왕필은 “곧음이란 한 가지가 아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직大直을 대절大節 즉 비타협적인 절개와 지조의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대교약졸’大巧若拙에 대해서는 내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마 서예에서만큼 졸拙이 높이 평가되는 분야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교巧가 아니라 졸입니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봉은사의 현판 ‘판전’板殿이란 글씨는 그 서툴고 어수룩한 필체로 하여 최고의 경지로 치는 것이지요.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일체의 교와 형식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법法까지도 미련 없이 버리는 경지입니다.
‘대변약눌’大辯若訥은 “최고의 웅변은 더듬는 듯하다”는 뜻입니다. 언言은 항상 부족한 그릇입니다. 언어로는 그 뜻을 온전히 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이 부족한 표현 수단인 것은 이해가 가지만 어째서 눌변訥辯이 대변大辯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짐작합니다만, 예를 들어 ‘맷돌’이라는 단어를 놓고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맷돌이란 단어에서 무엇을 연상합니까? 아니 어디에 있는 맷돌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습니까? 생활사 박물관이나 청진동 빈대떡집에 있는 맷돌을 연상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외갓집 장독대 옆에 있던 맷돌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언어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소통은 화자와 청자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맷돌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 세계의 소통 없이는 결코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자의 연상 세계와 청자의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정확한 의미의 소통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 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언어는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찾아내고 그 대상에 대한 청자와 화자의 합의가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언젠가 라이브 콘서트에서 느낀 것입니다. 노래 중간 중간에 가수가 엮어 나가는 이야기가 청중을 사로잡고 있었어요. 가수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압권이었습니다. 배경음악을 깔고 낮은 조명 속에서 이따금씩 말을 더듬는 것이었어요.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것을 찾느라고 가끔씩 말이 끊기는 것이었어요. 말이 끊길 때마다, 나도 그랬지만, 청중들이 그 가수를 걱정해서 각자가 적당한 단어 한 개씩을 머릿속으로 찾아보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뜸을 들이던 가수가 찾아낸 단어가 우리가 생각해낸 것보다 한 수 위였어요. 그 순간 청중은 언어 감각에 있어서 가수보다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어요. 가수에게 패배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더듬는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더듬음은 청중을 지배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대변大辯이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눌변訥辯이 청자의 연상 세계를 확장해준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고요함이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가 더위를 이긴다는 것, 그리고 고요한 것이 천하의 올바름이라는 것은 역시 노자 사상의 당연한 진술입니다. 왕필본에는 ‘조승한躁勝寒 정승열靜勝熱’로 되어 있습니다만 전체적인 의미 맥락을 존중하여 최근에는 많은 학자들이 예시문처럼 ‘정승조靜勝躁 한승열寒勝熱’로 바꾸어 읽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후자를 따랐습니다. 천하의 올바름이란 바로 자연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요함이란 작위가 배제된 상태를 의미함은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