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를 튼튼히 해야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제3장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해야 하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보여주
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는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게 하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
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고, (스스로) 지혜롭
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정치를 하면 혼란이 있을 리 없다.
번역이 자연스럽지 못하지만 전체의 뜻은 짐작되리라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노자의 정치론이라 할 만합니다. 노자가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는 매우 순박하고 자연스러운 질서입니다. 우선 현賢을 숭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참으로 노자답다고 하겠습니다. 현이란 무엇입니까? 지혜라고 해도 좋고 지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우리가 습득하려고 하는 지식이나 지혜란 한마디로 자연에 대한 2차적인 해석입니다. 자연에 대한 부분적 지식이거나 그 부분적 지식을 재구성한 언어와 논리들입니다. 당연히 자연으로부터 일정하게 괴리된 것이 아닐 수 없지요. 이러한 것을 숭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오직 농부만이 일찍 도를 따르게 된다고 합니다(夫唯嗇 是以早服: 제59장). 자연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貨)을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화貨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화는 자기가 만든 농산물이 아니라 공산품工産品이라고 해야 합니다. 당시의 공산품은 직접적 생산품이 아니고, 또 1차적인 필수품도 아니었다고 해야 합니다. 화貨란 경제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상품입니다. 그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속성인 물건이 화입니다. 현賢이 2차적인 재구성이듯이 화도 자연산이나 농산물이 아니라 2차 생산품인 공산품입니다.
노자의 이러한 주장은 마치 오늘날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구하기 어려운 화貨를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오늘날은 농산물에 비해 공산품의 가격이 훨씬 비쌉니다. 사람이 만든 것보다 기계가 만든 것이 훨씬 더 비쌉니다. 네팔에서 느낀 것입니다만 수입 전자 제품은 네팔 사람들로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고가인 반면에, 엄청난 수고가 담겨 있는 수공예품은 그 값이 거저나 다름없었습니다. 볕바른 좌판에 놓여 있는 수공예품 앞에 앉아서 너무나 낮은 가격에 당사자가 아닌 내가 마음 아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외환 제도나 시장가격이란 고도의 수탈 메커니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자가 물론 오늘날의 외환 제도나 가격 메커니즘을 전제로 이야기한 것일 리는 없지만 화貨의 가격이 등귀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언급되는 심心과 복腹, 지志와 골骨의 대비에서도 이러한 관점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과 골을 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심과 지는 비우고 낮추어야 하며 복과 골은 채우고 튼튼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자가 대비시키고 있는 심지와 복골이라는 두 그룹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위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복골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심지가 타율신경계인 데 비하여 복골은 자율신경계이기도 합니다. ‘불견가욕’不見可欲의 욕이 이를테면 심지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정치학입니다. 한 사회의 물적 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근간임은 물론입니다. IMF 사태 때 우리 사회의 허약한 토대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경제학 강의가 아니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만 IMF 사태는 한마디로 자립적 토대가 허약하기 때문에 겪은 환란이었지요. 복과 골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IMF 극복 방식이 복과 골의 강화를 외면하고 임시 미봉책으로 일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IMF 사태 이후에 자주 듣고 있는 구조 개혁이나 구조 조정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조에 관한 것이 아니지요. 토대의 개혁이 아닌 미봉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미봉책으로는 같은 돌에 두 번 세 번 넘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나는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수많은 화貨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합니다. CF 광고나 쇼윈도 앞에서 무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순간순간 구매 욕구를 억제해야 하는, 흡사 전쟁을 치르는 심정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부단한 갈증에 목마른 상태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상품 생산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라고 해야 합니다.
지식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것이 지식 상품의 CF라고 생각합니다. 지식도 상품입니다. 상품으로 생산되고 상품으로 유통됩니다. 상품의 운동 원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비가 미덕이 되고 부단히 새로운 상품이 생산됩니다. 그리고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상품 이외의 소통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상품 형태를 취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시장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설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상품화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언어도 상품이 됩니다. 지식의 도구인 언어 그 자체가 가장 이윤 폭이 큰 첨단 상품이 되고 있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도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도무지 무욕無欲할 수도 없고 무지無知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와 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의 현대적 재조명이라고 생각하지요.
노자는 또 지자智者들로 하여금 함부로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자들이 벌이는 일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일들을 지자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지요. 현賢을 숭상하고, 난득지화難得之貨를 귀하게 여기게 하고, 욕망 그 자체를 생산해내고, 심지心志를 날카롭게 하는 등 작위적인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지자들이지요.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자들은 특히 그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노자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작위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옷처럼 만물을 감싸 기르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衣養萬物而不爲主: 제34장).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혼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爲無爲 則無不治). 나아가 천하는 무사無事로써 얻을 수 있으며(以無事取天下: 제57장), 감히 천하를 앞지르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제67장)고 합니다. 이 장의 지자智者는 오늘날 정치 지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사람이며, 무언가를 하겠다고 공약하는 사람이지요.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노자적非老子的 성향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서예를 사사받은 정향靜香 선생님은 해방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투표하신 적이 없다고 실토하신 적이 있습니다. 투표하시지 않은 이유가 매우 특이합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찍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더라도 선뜻 나서지 않아야 옳다는 것이지요. 하물며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서 남을 낮추어 말하고 자기를 높여서 말하는 사람을 찍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지역의 어른이시고 자연히 사람들의 이목이 있기 때문에 투표일에는 투표소를 한 바퀴 휘익 돌고 오신다는 것이었어요. 아마 노자에게 선거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투표하러 가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노자의 정치학이 이와 같습니다.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治大國若烹小鮮: 제60장)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생선의 비유는 일상생활의 비근한 예를 들어서 친근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소위 국가와 사회를 경영하는 방식을 반성할 수 있는 정문일침頂門一鍼의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가에서는 이 제3장을 들어 노자 사상은 우민 사상愚民思想이며 도피 사상逃避思想이라고 비판합니다. 무지無知, 무욕無欲 그리고 무위無爲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전체의 의미를 읽고 전체적 연관 속에서 부분을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구와 부분을 도려내어 확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부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것이지요. 미운 사람을 험담하는 경우에 그렇게 하지요. 부분의 집합이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부분의 확대는 전체의 본질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노자』 독법의 기본은 무위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무위는 무행無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無不治)입니다. 혼란(不治)이 없는(無)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은둔隱遁과 피세避世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세改世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방식이 유원하고 근본을 경영하는 것이란 점이 다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