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변란 획책 '청구회' 조직원은 소년 여섯명이었다
[서평] 신영복 선생이 쓴 <청구회 추억>
오마이뉴스 2008.8.14
|
▲ 신영복 선생이 40년전 감옥에서 쓴 <청구회 추억> 겉 표지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잘 알려진 신영복 선생이 40여 년 전인, 1969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쓴 수필 <청구회 추억>(돌베개 펴냄)이 단행본으로 나왔다. 선생이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69년 1월에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이송된 후 사형수로 지내는 동안에 쓴 글이라고 한다.
<청구회 추억>을 쓰고 난 후 신영복 선생은 대법원에서 원심이 파기되어 무기징역형을 받아 1998년 가석방 때까지 20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잘 아시다시피 고단한 수감 생활을 하며 쓴 편지글을 모아 엮은 책이 바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요즘 판매되고 있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증보판에는 <청구회 추억>이 들어 있지만, 386세대 독자들이 많이 읽은 1988년에 '햇빛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온 책에는 포함되지 않은 글이다.
왜냐하면, 신영복 선생이 20년 옥살이를 시작할 무렵에 쓴 <청구회 추억> 원고를 다시 발견한 것이 출소 이듬해인 1999년이기 때문이다. 출소 이듬해에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30년 만에 다시 발견된 원고라고 한다.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종이로 된 휴지에, 항소이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빌린 볼펜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록이라기보다는 회상이었다. 글을 적고 있는 동안만은 옥방의 침통한 어둠으로부터 진달래꽃처럼 화사한 서오릉으로 걸어 나오게 되는 구원의 시간이었다."
- '청구회 추억의 추억' 중에서
당시 선생은 교도관들 몰래 <청구회 추억>을 비롯한 여러 가지 메모를 휴지에 기록해 공책처럼 묶어 몰래 감추어 두고 있었다고 한다. 교도소 생활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1971년 9월 어느 날 갑자기 군교도소에서 민간교도소로 이송통보를 받아 떠나면서 황급하게 근무 헌병에게 '휴지묶음'을 부탁했던 것이다.
당시 근무헌병이었던 청년은 "집에 전달해주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면 당신이 가져도 좋다"는 언질을 받았지만, 사상범이 전해 준 불온한(?) 문서로 취급받을 수도 있는 휴지묶음을 가족들에게 전해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종이가 삭아 부스러질 정도가 되어 버린 <청구회 추억>이 1993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영인본과 1998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증보판에 실리게 된 것이다.
40년 전, 감옥에서 쓴 육필원고자칫 독자들을 만날 수 없었던 아슬아슬하고 긴 세월을 지나온 것이다. '기록이 기억을 이긴다'는 말처럼 활자로 '기록'된 '기억'이 얼마나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 같은 일이다. 선생이 총살형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에서 지워내지 못하면서도 <청구회 추억>을 재생휴지에 기록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독자들에게 40년 전의 기억을 생생하게 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청구회 추억은 길고 긴 20년 감옥살이를 시작하기 전, 숙명여대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지내던 시기에 여섯 꼬마들과 맺었던 끈끈한 '우정'을 담은 글이다. 육군교도소에서 혹시 닥칠지도 모르는 죽음을 앞두고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기로 했던 청구회 어린들과 약속을 떠올리며 쓴 글이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장충체육관 앞에서 애타게 기다릴지도 모를 소년들을 생각하며, 감옥벽에 기대어 소년들과의 첫 만남부터 헤어지게 된 순간까지를 빠짐없이 떠올리며 쓴 글이다.
|
▲ 신영복 선생이 청구회 어린이에게 받았던 편지 |
이야기는 지은이가 서울대학교 문학회의 초청을 받아 서오릉으로 봄나들이를 가던 중에 여섯 소년들과의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 꼬마 여섯 명에게 호기심이 발동하여 먼저 말을 걸게 되는데, 처음 말문을 열기 위한 '마음속 준비' 과정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만일 '얘, 너 이름이 뭐냐?'라는 첫마디를 던진다면 그들로서는 우선 대답해 줄 필요를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는 불쾌감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뱅글뱅글 돌아가기만 할 뿐 결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을, 그리고 어린이들이 가장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놀림의 느낌이 전혀 없는 질문을 궁리하여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서오릉 소풍길에 우연히 길동무가 된 만남이지만, 여섯 아이들과 첫 만남을 위해서 '공'을 들이는 지은이의 노력을 역력히 느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다가서자 경계하며 긴장하는 아이들 마음을 단박에 알아챈다. 그래서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는 아이들 예상을 뒤엎고 그들을 앞질러 버릴 때까지 말을 걸지 않음으로써 아이들 마음 속 긴장을 풀어내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른이 아이들 세계로 들어가는 길"반드시 대답을 구하는, 그리고 대답이 가능한" 첫 마디를 던지기 위하여 곰곰이 생각한 끝에, 불현듯 생각난 듯이 아이들을 향해 돌아서며 "이 길이 서오릉 가는 길이 틀림없지?"하고 첫 마디를 던진다. 아이들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그는 예상대로 아이들로부터 과분한(?) 답을 듣게 되었다.
"네. 일루 곧장 가면 서오릉이네요."
"우리도 서오릉엘 가는 길이어요!"
예상보다 훨씬 좋은 대답을 들은 후에는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하는 질문과 답이 수월하게 오고가며 아이들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어른들 중에는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런 어른들 중에 한 명이다.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 "대답해줄 필요를 느끼지 않을" 질문을 해대기 일쑤다. "너 이름이 뭐냐?" "너 나이가 몇 살이냐?" "너 어느 학교 다니니?"하는 이런 질문들이다.
이런 수준 낮은(?) 질문으로는 아이들에게 다가설 수도 없고, 아이들과 소통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아이들 세계와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아니 꼭 아이들이 아니어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마음을 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건네는 첫 마디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지 꼭 한 번 돌아볼 일이다.
<청구회 추억>은 이렇게 서오릉 봄나들이 길에 인연을 맺은 여섯 소년과 지은이가 여러 해 동안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다. 그날 헤어질 때 진달래꽃을 선물 받고 주소를 적어주고 사진을 찾아주마 약속했지만 이내 그들을 잊고 지내게 된다. 얼마 후 아이들에게서 편지를 받고는 무심한 장난질이 되었다는 자책감과 함께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다가오는 토요일에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이때부터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그 뒤에는 매월 첫 번째 일요일로 바꾸어 선생이 감옥에 갈 때까지 만남을 이어간다. 서울대 출신에 대학 교수와 중학교 진학도 힘든 문화동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이 매월 꼬박 꼬박 만나서 책도 함께 읽고, 저축도 하고, 골목 청소도 하는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된다.
누가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아이들에게 진정한 '선생'이 될 수 있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일화이다. 또한 어린 시절 '추억' 한 장면이 어떻게 아이들에게나 사형선고를 받은 지은이에게나 힘든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훗날, 지은이가 중앙정보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이름을 딴 이 모임 이름 '청구회'는 국가변란과 혁명을 획책하는 조직으로 추궁 당하는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추억은 과거가 아니라 살아 성장하는 생명체그리고 또 훗날 자신을 청구회 어린이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고등학교 시절에 본 '전장의 아이들'이라는 그림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긴 감옥살이에서 돌아온 그림을 다시 보던 날, 서오릉 길에서 만난 어린이들이 바로 그림 속 어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
▲ 화가 김영덕이 그린 '전장의 아이들' 신영복 선생은 고등학교 시절에 본 이 그림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이 훗날 청구회 어린이들을 만나게 해주었다고 한다. |
"우리의 삶은 수많은 추억으로 이루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추억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만나는 곳은 언제나 현재의 길목이기 때문이며, 과거의 현재에 대한 위력은 현재가 재구성하는 과거의 의미에 의하여 제한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추억은 옛 친구의 변한 얼굴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이 추억의 생환이란 사실을 나중에 깨닫기도 한다."
- 청구회 추억의 추억 중에서
그리하여, "추억은 화석 같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단히 성장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며, 언제나 새로운 만남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영역을 맡은 조병은 교수는 이 책을 "만남에 관한 글이고, 선생의 의미를 묻는 글이며, 중년의 독자에게는 유년 시절의 자아와 만나게 하는 글"이라고 한다. 또한 역자와 평론가들은 문학적으로 매우 값어치 있는 글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나의 소양으로 문학적 값어치에 대하여 어림할 수는 없지만 마음 따뜻하게 해주는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단행본으로 나온 <청구회 추억>은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성공회대학교 조병은 교수가 영어로 번역한 영역본과 김세현이 그린 '예쁜' 그림으로 엮어져있다. 아이들과 함께 읽어도 좋을 동화 같은 느낌이다. 길지 않은 수필이기 때문에 단숨에 읽을 수 있지만, 오래도록 긴 여운이 남는 책이다.
<오마이뉴스 - 이윤기 ymcaman@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