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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라도
                     한용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떠다놓으면 당신은 대야 안의 가는 물결이 되어서 나의 얼굴 그림자를 불쌍한 아기처럼 얼러줍니다.
  근심을 잊을까하고 뒷동산에 거닐 때에 당신은 꽃사이를 스쳐오는 봄바람이 되어서 시름없는 나의 마음에 꽃향기를 묻혀주고 갑니다.
   당신을 기다리다 못하여 잠자리에 누웠더니 당신은 고요한 어둔 빛이 되어서 나의 잔부끄러움을 살뜰히도 덮어줍니다.

  어디라도 눈에 보이는 데마다 당신이 계시기에 눈을 감고 구름 위와 바다 밑을 찾아보았습니다.
   당신은 미소가 되어서 나의 마음에 숨었다가 나의 감은 눈에 입맞추고 '네가 나를 보느냐'고 조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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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 뿐이랴마는 시를 읽는 일, 음악을 듣는 일은 그저 눈으로 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 터이다. 내가 그 것들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나의 정서 안에 수용해서 공명할 수 있는 마음의 눈, 하마터면 말라버릴 뻔했던 미세한 씨앗을 예쁜 꽃으로 피워낼 수 있는 어떤 본원적인 창조성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는 해방의 기운을 내안에 품고 있을 때 시를 올곧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런 잠재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노동과 분리된 삶, 자연에 맞닿아 있지 않음으로 해서 이런 능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럴 자세를 갖는 다는 것은 제도적인 교육이나 훈련 보다, 뭔가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치관이 아닌 본원적인 인간의 고매함을 찾고자 하는 어떤 절절함이, 더 나아가 빌헬름 라이히가 말했던 일(노동)을 통해서 사회질서의 근본에 닿을 수 있는 무엇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라이히는 정치인이 갖은 삿된 거짓 말로 민중을 속일 수 있음은 바로 우리의 생활이 ,'일' 곧, 노동에 닿아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사회는 바로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사기'이다. 관념적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 가능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가 자연과 신진대사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입에 머무는 '말'과 '노동'은  다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덮어놓는 어떠한 '말'은 다 거짓이다.  

우리가 시를 만나는 일은 또 다른 그럴 듯한 '말'을 만나는 헛된 즐거움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를 쓴 작자의 삶이 바닥을 박박 긴 사람이거나 사회의 근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고달프게 살았던 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의 어떤 '말'의 꾸밈도 나를 감전 시킨다.

한용운의 시는 이렇게 읽으면 동시같기도 하고, 저렇게 읽으면 거대한 힘에 끝까지 게기겠다는 서슬 퍼른 무엇이 숨어 있는 듯 하는 기이한 힘이 감춰져있다.
여하간 나는 이 시를 이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으로 오염되기 이전의 순수함을 온전히 지키고 있었던 소년의 생각으로 돌아가서 만나고자 했다.  

나의 잘 못된 생각이라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특히 소비자본주의는 심미적 이성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인식의 능력을 잃게 한다. 자본주의 문명이 발전할수록 사회적 지성은 쇠퇴하며 인간들은 토론의 능력과 창조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해야 할 토론을 대중매체가 해주며, 우리가 결정해야 할 일들은 정체가 의심스러운 ‘여론’이라는 이름의 유령에 의존한 정치인과 기자들이 하고 있다. 참여 속에 성취해야만 하는 일들을 직업공무원에게 위임하고는 먹고사는 일에 몰두한다. 마치 밥도, 콩도, 시금치도, 돈만 있으면 이마트에 가서 살 수 있다는 자연스러운 인식이 우리 안에 들어앉히게 되는 것이다. 그게 어디 이마트에가서 해결될 수 있는 건가, 땅에서 농사지어야만 나오는 것이지, 그런데도 태반의 우리들은 이것조차 모르고 살고 있다.

어느 사회학자는 바로 우리의 관심사가 개인화되고 경제적인 문제에 갇히는 것이 문명 쇠퇴의 증표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런 과정의 중첩들을 거치면서 우리가 갖고 있던 총기는 희미해지는 것이다.  

시를 읽는다 함은 바로 잃어버린 총기를 회복하는 작은 시도가 아닐까 싶다. 나도 그러려고 시를 읽는다. 이 시를 읽고 각자 방식대로 공감하면 그런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어렴풋하게나마 찾을 수 있지 않겠나 싶은 맘에 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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