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무상은 정신의 피로를 회복하는 빈공간입니다. 잠이 육체의 피로를 회복하는 이완의 정점인 것과 같습니다.
이 비움과 이완이야말로 '생각하는 공간'입니다. 생각은 답습의 단절이고 기존旣存의 해체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우리들의 조작가능성 바깥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만나는 세계를 서둘러 개념화하고 분석하기 전에 당혹감 그 자체에 충실해야 합니다.
빈공간을 만들어 그 속에 무심히 앉아 있는 것 그것이 생각의 정점입니다.
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워집니다.
고목古木이 명목名木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나무와 달라서
나이를 더한다고 하여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며
젊음이 언제나 신선함을
보증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노老가 원숙이
소少가 신선함이 되고 안되고는
그 연월年月을 안받침하고 있는
사색의 갈무리에 달려있다고 믿습니다.
어제의 반성과 성찰위에서
오늘을 만들어 내고
오늘의 반성과 성찰 위에
다시 내일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사색의 갈무리가
우리를 아름답게 키워주는 것입니다.
서삼독(書三讀)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역사적 토대에 발 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독자자신을 읽어야 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입니다. 진정한 독서는 삼독입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징역살이는 여름이 더 괴롭습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36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구나 그 증오가
자기의 고의적인 소행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가장 큰 절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로부터 옵니다. 증오의 대상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자기혐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따뜻한 가슴(warm heart)과 냉철한 이성(cool head)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개인적으로 '사람'이 되고 사회적으로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사랑과 이성의 사회학이고 인간학입니다.
사랑이 없는 이성은 비정한 것이 되고 이성이 없는 사랑은 몽매蒙昧와 탐닉耽溺이 됩니다.
삶
'사람'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삶'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사람의 준말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경영하는 일의 70%가 사람과의 일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공부의 옛 글자는
사람이 도구를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란 삶을 통하여 터득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세계와 인간의 변화입니다.
공부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형식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존재형식은
부단한 변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