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경을 찾는 낭비 아버님께
어머님을 비롯하여 가내 두루 평안하실 줄 믿습니다.
저는 이달부터 행장급수(行狀級數)가 2급으로 진급되어 서신과 친견이 매월 4회씩 허용됩니다. 자주 편지 드리겠습니다.
의병 관계 문헌의 번역을 도운다면서 겨우 저의 한문공부나 하고 있는 정도입니다만 의병일기 속에는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이 서술되고 있어서 여태껏 추상적으로 이해해온 '의병'에 대한 그 관념성이 제거되고, 마치 당시를 방문하여 그들을 만나고 온 듯한 '현장성'을 얻게 됩니다. 만약 역사현상이 화석처럼 그 생명력(인간)이 고갈된 몇 조(組)의 '관념'으로서 받아들여진다면, 역사는 박제처럼 '외형'만 남겠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맹자}는 정독해 보려고 합니다. {논어}보다 장문이라 문리(文理)를 틔우는 데는 더 낫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고전 해독에 우선 한자의 어휘가 달리기도 합니다만 자훈(字訓)의 다기(多岐)함에 더 애를 먹습니다. 물론 독해의 절대량이 많아지면 지금 느끼고 있는 애로들 중의 상당한 부분이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저 우직하게 외곬으로 읽어나가는 것만 못한 줄 알고 있으면서도, 무슨 편법이나 첩경이 없나 자주 살피게 됩니다. 이것은 관심의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5월, 창 밖의 몇 점 신록에 이따금 피곤한 시선을 기대어 쉬곤 합니다.
1977.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