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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6.12.12 12:18

옷 벗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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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바퀴를 들어올리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내 좌석이 바퀴와 가까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오늘 아침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떠나 일본 TOKYO로 왔다.
NARITA에 도착 후 서둘러 택시를 타고 일본 변호사 사무실에
들려 변호사가 들려주는 그 간의 상황들을 간단하게 설명 받았다.
변호사가 내미는 각종 서류를 꼼꼼히 살펴 본 후 내 사인이 필요한
곳에는 사인을 하고 조금 미진한 부분이 있다 싶은 서류들은
첨부할 서류를 다시 요청하였다. 그 중에 급히 나의 사인이 필요한
서류들은 부족한 서류들을 보충해서 EMS로 부쳐 줄 것을 부탁하고
사무실을 나와 서둘러 GINZA로 나가 아이들이 부탁한 물건들을 샀다.
부랴부랴 택시를 집어타고 다시 나리다 공항으로 가 서울로 돌아 갈
비행기를 기다리며 그 때서야 숨을 돌리며 라운지에서 와인 한 잔을 마셨다.
얼마나 피곤한지 와인 한 잔이 들어가자 순간 목젖이 싸해지며 머리가 핑 돈다.
더 이상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잔을 놓고 잠시 쉬다 시간이 되었다는 안내 방송에
따라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승무원이 안내해 준 나의 자리에 앉자 그때서야 피곤이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새벽에 운전을 하고 집을 나서 인천 공항에서 TOKYO로 와 서둘러 일을 처리한 후 바로 그날  저녁 늦은 비행기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 인천공항에 세워 둔 나의 차를 운전해 다시 감악산 우리집까지 운전을 해서 돌아가야 하는 하루 만에 일본을 갔다 오는 빡빡하고 무리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은 정기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는 기내의 저녁을 사양하고 피곤한 눈을 감았다.

박영선 장군.
나의 아버지 이름이다.
평안도 선천이 고향인 아버지는 친구인 김일성과 한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
중국에서 공부하여 중국어에 능통하였다. 아버지는 중국인 육사를 나와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장군의 중국어 통역 보좌역으로 일하면서 일본군과 싸우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다 양세봉 장군이 일본군에게 사살되자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가 이 상황을 보고하고 중국 국민군 제2집단에 입대하여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항일전에 참전하였고, 광복시에는 중국 국민군 구국군 독립 제1사단 제 1사단장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조국이 해방되자 1945년 10월 당시 만세일보에 ‘박영선 장군 입성’이라는 타이틀로 정치면을 장식하며 고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제대로 군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던 해방된 조국에서 중국육사를 나와 군인교육을 받은 아버지는 ‘국군준비사령부 사령관’이 되어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그때 한국 상황은 어디서 독립 운동을 했는지도 명백하게 알 수없는 사람들이 조국이 해방되자 도처에서 나타나 깃발을 꽂고 누구나 당을 세우던 시절이었다.
한족회 회장이었던 아버지는 그렇게 난립한 33개의 당을 통일하였다.
남한 단독 선거를 구상하고 있던 이승만은 그런 아버지의 정치행동에 불안을 느껴
아버지에게 북에 있던 ‘조만식’선생을 모셔와 ‘김구’선생과 함께 통일을 상의하자고
설득하였다.
청춘을 조국 광복에 바치고 오직 조국을 통일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우직하기만 했던 아버지는 이승만의 말을 그대로 믿고 김구 선생과 함께 조만식 선생을 모시러 이북으로 올라갔다.
이북으로 간 아버지는 그곳에서 친구인 김일성에게 공산당 이념으로 조국을 해방하자는 회유를 받아야했다.
장개석 장군을 지지한, 김일성과 사상이 달랐던 아버지는 김일성의 회유를 거절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아버지를 소련군이 주둔한 이북의 철장에 가두어 버렸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설득과 회유와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제대로 된 군인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던 이북도 중국 육사를 나와 군인교육을
받은 아버지의 힘이 절대로 필요했던 것이다.
밤낮으로 이어진 모진 고문에 못 이긴 아버지는, 일단 김일성 말을 받아들이는 척하고 그 곳에 일을 보아주다 틈을 보아 야간도주를 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와 보니 그동안 남한은 이미 이승만이 남한만 단독으로 선거를 하여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있었다.
그제서야 속았다는 생각이 든 아버지는 당장 경무대로 달려가 부수고 난장판을 만들었다.
노련한 외교관인 이승만은 아버지를 다독이며 이미 대통령이 된 것을 물릴 수도 없으니 다음을 기약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우선 친일세력을 청산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친일세력을 청산하라고 설득하였다.
이승만 말대로 이미 대통령이 된 것을 바꿀 수 없던 아버지는 친일 세력을 청산할 세력인 반민특위의 ‘탐정위원장’이 되어 친일파를 숙청 할 것을 과업으로 삼았다.
하지만 앞으로 아버지를 그렇게 다독여놓은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친일세력을 이용해야 하는 만큼 뒤로는 온갖 음모를 부리며 반민특위 위원들을 암살할 계획을 꾸미기도하고 국회 프락치사건을 조작하였다. 정신적인 지주였던 ‘김구’선생마저 암살되고 결국에는 반민특위 경찰들마저 친일경찰을 이용해 무장해제 시킴으로 반민특위는 무너졌다.
처음부터 노련한 전략가이자 야합가인 이승만의 적수가 아니었던 순진한 이상주의자인 아버지는 어제까지 독립을 위해 같이 싸웠던 동지가 이제는 적이 되어 같은 민족을 죽이는 것을 보며 완전히 좌절해 버렸다.
그 당시에는 일제시대 삼공장 여관이었던 지금의 3.1빌딩 자리에 고아원이 들어서있었다고 한다. 그 때 이승만이 아버지를 회유하기 위해 준 고아원 운영권이나 봉이 김선달 식의 한강 골채권등을 잘 챙겨두었다면 재벌이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든 것을 던져버린 후 자포자기 상태로 술과 여자로 자신을 죽여 버렸다. 똑같은 이상주의자에다 사랑지상주의 자이자 낭만적이었던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한 나의 어머니 역시 그런 아버지의 뜻을 기꺼이 따랐다. 그 덕분에 대부분의 독립투사 후손들이 그랬듯 우리 가족은 엄청난 고생을 해야만 했다.
우리나라는 한참이 지난 후인 1990년에야 아버지의 업적을 기려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아버지는 지금 당신의 업적이 잔뜩 써진 묘비를 앞에 놓고 국립묘지 명당자리에 홀로 잠들어 있을 뿐이다.

이상이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다.
아버지......
그 순수한 열정에 순진한 이상주의자인 투사.
차라리 나는 투사 아버지보다 영악한 부자 아버지가 더 좋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런 아버지를 두지 못했다.
그 불행은 고스란히 나의 것 이였다.
독립투사이자 애국자를 아버지로 둔  딸인 나는 일본인을 남편으로 두었고
나의 아이들은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쓴 웃음을 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의 아이들의 국적을 얻기 위해,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해, 나는 일본에서
거대한 바위를 치는 계란이 되어 외로운 투쟁과 힘겨운 전쟁을 벌였다.
그 것은 내 나름대로의 나의 주권을 찾기 위한, 아버지와는 또 다른 나의
독립운동이었다.
TOKYO의 구청에서, 세무서에서, 재산관리국에서 등기소에서 보험 관리국에서
내가 싸워야 했던 힘들고 외로운 투쟁들........
눈물은 흘릴 여유가 없었다.
눈물은 아껴 두어야 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지금의 나의 앞 이는 전부 해 넣은 이다.
그 때에 얼마나 이빨을 악물고 다녔는지 그 후에 나의 이들은 전부 금이 가고
못 쓰게 되어 다시 해 넣어야 했다.
일본에도 양식 있는 양심인은 있었다.
나의 싸움을 진정으로 격려하고 도와 준 사람들이었다.

"혼인신고는 대략 일주일이 걸리지만 이 것은 처음있는 일이라 다소 시간이
걸립니다.
미국 사람이 자기 자식을 인정하고 데려 간 적은 간혹 있지만 일본 사람이
자기 자식을 인지하고 결혼신고까지 한 적은 한번도 없는 일이라 변호사와
상의해서 호적을 만들고 있으니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요."
한국의 호적직원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한 말이다.

나는 이겼다.
결코 이길 수 없던 다윗과 골리앗과 같은 싸움에서........
아버지처럼 자학으로 무릎 꿇지 않았다.
나는 좌절하지도 내 자신을 타락시키지도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나의 아버지와 똑 같이 좌절하고 타락하고 현실에 순응하고 굴복하여
나의 아이들에게 내가 겪은 아픔과 고생을 똑같이 물려 줄 수는 없었다.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아버지와 달리 나는 서서 죽지도, 꿇고 살지도
않아야 했다.

드디어 나와 아이들이 일본 호적과 국적을 손에 쥔 날.
외롭고 힘들게 싸워 이겨 얻은 내 권리들을 손에 꼭 쥐고
NARITA 공항에서 비행기에 선명하게 새겨진 태극 마크를 보고 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결코 그렇게 그런 식으로 일본의 한 공항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난 역시 부정 할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딸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나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한국인으로 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병들은 나의 일본인 남편을 거두고
지키고 보살펴야했다.
그것은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자존심이고 의리였다.

중환자실에서 겨우 퇴원한 남편이 가쁜 숨을 몰아 쉴 때,
나는 딸에게 소리쳤다.
“어서 119불러! 아빠가 이상 해!”
나의 딸은 소리치는 나에게로 다가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나 엄마가 아빠 닮았다고 했지? 그러면 아빠 이대로 보내드리자.
이제는 아빠 그만 쉬게 해 드리자. 내가 아빠라면 이대로 더 살고 싶지 않을 거야.
그 깔끔한 아빠 성격에 대소변을 가리지도 못하고 누워 사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을 거야.
더 살게 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욕심이야. 저렇게 누워 몇 칠 더 산다고 무엇이 달라져?
우리 마음은 편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빠는 결코 편하지 않을 거야.
호스를 끼고 죽을 코로 넣어가며 아빠 더 이상 고생시키지 말고 편하게 해 드리자.
그러니 엄마, 아빠 이제 그만 보내드리자.”
나의 딸의 물기어린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아빠에게 한 번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도 못했어.
한 번도....한 번도.....비겁한 나는.... 나를 괴롭히는 대신 아빠를 괴롭혔어......”
나의 말은 나의 목에서 제대로 나와 주지 않았다.
“엄마, 아빠는 다 아셔. 엄마 마음 말 안 해도 다 아실거야. 그러니 이제 보내드리자.”

죽어가는 남편은, 언제나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먼저 감악산을 바라보며 절실히 고개를 숙였다.
죽어가는 그가 간절히 빈 것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가, 나와 함께 관에 같이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나를 무섭게 한 적은 있었지만 지금 빌고 있는 모습은 적어도 그가 자신을 위한 극락왕생이나 더 살 것을 빌거나 나와 함께 관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빌고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빌고 있는 모습은 세상에 내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간절함과 절실함이었다.

딸의 손을 놓은 나는 남편에게 다가가 가랑잎처럼 바싹 마른 남편의 몸을 일으켜
안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남편을 안은 나는 아이들에게 깨끗한 옷을 꺼내라고 했다.
그 때 남편은 나의 품 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고 있었다.
‘고...마...워....’
남편이 세상에서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나는 너무나 차분해져 있었다.
일본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의 죽음을 알렸다.  
일본에 있는 큰 아들은 아버지가 물려 준 회사일로 외국 출장이 잡혀있어
장례에 참석할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냐고 물으니 안 보아도 괜찮다고 한다.
일단 알리는 것으로 아들에게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오고 안 오고는 자신의 문제다.

이제 마지막 마무리를 해야 한다.
나의 형제들도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해야 하고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할 나의 마지막 일이였다.
남편의 시신을 병원에 안치 한 후 사망 통지서를 받아 대사관을 찾아가 화장 승낙서를
받았다. 아이들 둘과 나 이렇게 셋이서 남편의 마지막 하관을 치켜보았다.
남편이 세상에서 입는 마지막 옷인 수의를 입을 때, 아이들이 장학금을 받은 것을 세상을 떠나는 남편의 마지막 여비로 넣어 주었다.
영구차에 남편의 시신이 넣어지고 아들이 영정을 들고 탔다.
딸은 나를 염려해서 나의 차를 함께 타고 가려고 했지만 나는 아빠 곁에 그리고
동생 옆에 함께 있어 주라고 딸을 영구차에 태웠다.
아들과 딸이 달랑 둘이 탄 영구차가 앞장서고 난 운전을 하고 영구차 뒤를 따랐다.
남편의 시신을 화장하고 난 후,
딸이 아버지의 유골이 들어있는 함을 받으면서 한 말은 한마디였다.
“아! 아빠가 아직 따뜻하다.”

나는 유골함을 나의 방에서 감악산이 잘 보이는 곳에 49일간 놓아두었다.
그에게 할 말이 많았다.
49일간 다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49제를 지내기 위해 절로 가기 전, 남편이 매일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던, 감악산이
잘 바라보이는 곳, 양지바른 곳에 아이들과 함께 남편의 유골을 뿌렸다.
민족의 감정을 떠나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우리 가족을 도와주고 나의 형제들을 도와 준 사람.
나 때문에 조국까지 포기하고 화려한 장례도 포기하고 타국에서 죽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위해 도리를 다 하는 것은 내가 할 마지막 일이였고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자존심이었고 의리였고 내가 끝내야 할 일이였다.
그의 뼈를 아이들과 함께 뿌리며 나는 모든 것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끝냈다.

남편의 큰 아들이 왔다.
그는 유골을 가지고 가고 싶어 했다.
장례도, 마지막 모습도 보지 않은 그는 아버지 유골을 가지고 갈 자격이 없었다.
아들은 자신의 체면 때문에 일본에 있는 화려한 그의 가족 묘지에 남편을 묻어야했다.
나는 냉정히 거절했다.
부인의 자격으로 거절 할 명분은 확실했다.
아들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여기에서 뿌려져야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지금 나는 그의 부인으로 모든 것들을 상속받아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나는 이겼다.

그리고 나는 요즘 고민한다.
불법과 투기와 거짓이 난무하고, 여자는 약자고, 잘못을 해도 일단 큰 소리를 치고 우겨야 한다는 몰상식이 통용되고 아직까지 진리인 이 나라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공석에서 함부로 소리를 지르고 남에게 피해가 되어도 아이들 기를 죽인다고 나무라지 않는 부모들이 살고 그런 아이들이 자라는 이 나라에서 나의 아이들을 기르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어느 날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명아니? 소윤 아빠는 요즘 어떠시니?”
“돌아가셨어.”
“뭐라고! 언제?”
“49일이 지났어.”
“뭐라고? 왜 연락 안 했니?”
“그건 내가 매듭지어야 할 일이야. 나 혼자 할 일이였어.”
수화기 맞은편에 한 참 말이 없다.
“너.....사람 맞니? 작은 것들이 지독하다더니.....징그러운 것 같으니.....”
엄마를 닮아 후리후리하게 키가 큰 언니의 전화가 갑자기 뚝 끊긴다.
“뚜...뚜...뚜....뚜....”

‘독하다...징그럽다...’
나는 홀로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한 마리에서 새끼를 낳아 5마리로 늘어난 개들이 종족수를 늘리자 이제는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리의 힘을 빌려 사냥까지 한다.
그렇게 사냥에 희생된 너구리가 앞마당에 또 죽어있다.
동물의 본능적인 욕심에 나는 진저리를 친다.
이제는 죽은 너구리를 파묻는 것도 지겹다.
나는 삽으로 죽은 너구리를 퍼 담아 산으로 집어 던졌다.

나는 투사의 딸 맞다.
어디를 가던, 어디에서 살 던, 나는 언제나 씩씩하고 당당하게
꿇고 살지도 서서 죽지도 않으며 살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많은 고민들을 했다.
하지만 나는 정직하게 옷을 벗기로 했다.
정직하지 않은 ‘관계’는 나에게 의미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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