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잘못 든 세속인 1

by 박 명아 posted Feb 1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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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의 두터운 갑옷을 완전히 벗고 나가는 유일한 곳이
바로 창작 강의 수업을 받으러 가는 때다.
더불어 숲 모임 때도 물론 갑옷을 벗긴 하지만 완전히 벗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창작 강의 수업에 만나는 문우들은 나와 너무나
같은 코드를 가진 미친 인간들이기 때문에 궂이 거추장스럽고 두터운 갑옷을 입고
만날 필요가 없는 사이다. 우리는 서로의 눈빛, 작은 손동작, 눈썹 떨림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안다.
그런 우리는 만나면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나 편한 사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론 너무 같아 불편한 사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으므로........
아무 것도 감출 수가 없으므로........
모두는 아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대부분은 끼를 가지고 있다.
원고지 백매를 한 순간에 써내려 갈 때는 끼의 발동 없이는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
한 마디로 거기에 미쳐야 한다.
그런 미친 끼들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으니 서로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은 기본 아니겠는가.

우리들은 각자 쓴 작품만 보아도 글을 쓴 사람의 철학과 마음의 상태를 어림짐작한다.
그런 우리가 만나는 그 시간은 포장도 가식도 필요 없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시간이기도하다.
우리들은 서로 모이면 우리들이 쓴 작품을(작품이 없을 때는 기성작가의 글을 읽고 발제하지만) 돌아가며 읽고 발제하고 토론한다.
그날 작품을 낸 사람은 우리들의 가차 없는 융단폭격과 마지막으로 우리를 가르치는 중견작가의 직격탄을 맞고 무수하게 받은 상처의 아픔을 티 안내려고 안간힘을 써서 참으려고 헉헉거리다 기절상태가 된다.
그 기절상태에서 깨어나 기운을 차리고 집으로 향해 다시 글을 쓰게 만드는 시간이
뒤풀이 시간이다.
결코 쉽지 않는 길을 가겠다고 작정한 우리들은 뒤풀이 시간에 참고자 했던 상처의 신음까지를 모두 내려놓고 서로 벌거벗은 정직한 모습으로 마주 앉는다.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영악스럽고 계산적인 세상에서 결코 돈벌이가 될 수 없는(물론 예외적인 몇몇 작가들은 제외하고) 피를 말리는 작업인 글쓰기를 미련스럽게 고집하는 있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된다.
울고불고 눈물을 흘리며 열띤 토의가 벌어지고........
우리는 미친 집단 맞다.
우리는 각자 너무나 강한 개성들을 가지고 있어 서로가 어느 정도까지 다가가야 하는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전날 빈가슴끼리 울고불고 난리를 쳤어도 우리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서로 만나면 생깐다.
각자 자신의 글을 올리고 그 사람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고 방을 나가버린다.
그게 서로에게 대한 예의다.
언니, 잘 갔어? 라든지 어제 많이 마셨는데 괜찮아? 라는 말을 건네기 위해 대화창을 열어놓고 기다려보았자 헛일이다.  
그런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인사는 생까고 서로 글만 올리고 냉정하게 방을 나가 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전날 밤을 세우며 울고불고 서로의 상처와 고뇌들을 나눈 사람들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행동들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 대부분은 아주 이기적이고 못됐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다.(하지만 영악스럽게 상대방을 이용하거나 사기 치는 사람들도 없다)
우리 모두는 그런 것에 서운해 하거나 상처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자신이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배려 또한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려를 거추장스럽고 귀찮게 생각한다.
그러다 또 한 주가 지나 다시 만나면 다시 울고불고........
우리는 미친 사람들 맞다.
사회에 결코 동화될 수도 없고 동화 되지도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
길을 잘못 든 세속인들이다.
그 중에 간혹 착하고 가슴이 따뜻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씨가 훌륭한 사람들도 있다.
(나 같은 사람...ㅋㅋ 또 약 먹을 시간이 되었나....)

나와 함께 공부하는 사람은 총 12명인데 나보다 한 살이 많은,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눈을 잃은 형이 한 명 있고, 나보다 2살 어린 노동운동을 하는 후배가 한 명 있고, 주부 2명, 청년 1명, 그 나머지는 처녀들로서 다들 글쓰기를 고집하는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난 길을 잘못 든 세속인들이다.
부천에 사는 눈을 잃은 형은 어느 날 온통 얼굴에 상처투성이를 하고 나타났다.
“형, 얼굴은 왜 그래?”
“전철 타려다 굴렀어.”
“뭐라고? 어쩌다?”
“술 마시고 굴렀어.”
“술을 너무 마셔 마눌에게 맞은 것은 아니고?”
건대사태 때 끝까지 남아 공포의 순간을 맞았던 그림을 그리는 형의 마눌은 형에게 보상금이 나오면 돈을 받고 이혼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단다.
“형, 보상금 나오면 마눌에게 숨기고 주지 마.”
“왜?”
“마눌이라도 있어야지, 마눌마저 가면 형 어떻게 할래? 악처라도 있어야지.
그러니 절대 주지 마. 나 형 책임 못 져.”
“그렇게 돈을 미끼로 데리고 살고 싶지 않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그런 형에게 보상금 받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년은 뭔데?
눈을 잃은 대신 받는, 그 돈을 받아 가지고 가겠다고 기다리는 년은 뭐냐고? 혼인 신고도 하지 않았으니 위자료 줄 필요도 없어. 그 년 정말 건대사태 때 데모하던 년 맞아?”
“허허허.......”
형은 허탈하게 웃는다.
“하긴 운동하던 년 놈들이 변질되면 더 더럽게 변하니까........”
그러던 형이 요즘은 나오지 않아 걱정이 된다.
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없다.
‘이 인간 마눌에게 돈 뺏기고 방안에서 홀로 술 퍼먹다 죽은 것 아니여........’

“석호야, 너 치질 수술 어디서 했냐?”
노동운동하던 놈이 몇 칠 전 치질수술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카페에 글을 올리고
있다고 하고 난 후에 처음 얼굴을 비친 것이다.
“왜? 선배도 치질 있어?”
“야, 임마, 대한민국의 40대에 임신 경험이 있는 대다수의 여자들이 만성 치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상식이야. 운동하는 놈이 뭘 배웠냐? 그러니 매일 그 모양이지...."
"우리 와이프는 없는데?"
"너의 와이프는 한 명 밖에 안 낳았잖아. 아니면 나와 달리 이렇게 갸날프지 않고
항문 괄약근이 엄청 튼튼하던지,"
"그런가? 우리 와이프도 갸냘픈데...."
"네가 들여다 보았니? 그 정도로 와이프에게 관심이나 있어? 애를 낳을 때도 운동인가 뭔가 한다고 안 간 놈이....너의 와이프가 착하니 널 버리지 않고 데리고 사는 거야. 그러니 있을 때 잘해. 건 그렇고 나도 하긴 해야겠는데.....이제 아픈 것은 영 무서우니 .....많이 아프던?”
“어느 정도인데? 정도에 따라 다르지.”
“보여주련?”
“아이고! 선배, 제발 좀, 됐습니다요.”
“별로 심하진 않아.”
“그러면 별로 아프지 않아요.”
“그래? 날 잡아서 하긴 해야겠다. 그런데 입원을 해야 된다고 하던데.......”
“입원 안 해도 돼요.”
“아니야. 난 입원할 거야. 그 핑계 잡아 좀 쉬고 싶다.”
“되게 바쁜 척 하네. 백수인 주제에.”
“백수들이 더 바쁜 거야.
그건 그렇고 인천 택시기사 분신 사건, 해결 됐니?”
금방 목소리가 우울해진다.
“아직........ 그러고 있지 뭐........”
나는 화제를 바꿨다.
“개성 나무 심기에는 언제 가냐?”
“응, 4월인가에 갈 거야.”
“그래, 그럼 연락해라. 함께 가자.”

우리를 가르치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작가 선생님은 다른 작가들처럼 자신이 작가인척 하지도 않고 작가의 신분을 내세워 선생님을 하늘처럼 우러러 보는 작가 지망생들인 여학생을 홀리는 일도 없다.
깔끔한 사람이다.
우리들은 뒤풀이 시간에 자신들의 첫사랑 얘기를 돌아가면서 하고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첫사랑 얘기를 듣고 난 후, 정직한 내 주둥이가 닥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그년 나쁜 년이에요. 그러니 이제 선생님 그 년 추억하며 슬퍼하지 마세요. 그런 년은 추억할 가치도 없어요. 선생님께서도 아시잖아요. 사랑하면 결코 이기적일 수 없다는 것, 너무 잘 아시잖아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에요. 어떻게 선생님을 버리고 가 놓고 선생님이 신문에 날 때마다 찾아와 이혼을 하라고 할 수 있지요? 지가 먼저 버리고 간 주제에........선생님 바보예요? 아니, 선생님께서는 첫사랑의 추억을 잃고 싶지 않고 기억하고 싶어서 선생님 자신을 위해서 그 추억에 매달려 계신 것은 아닌가요?”
선생님께서는 나를 건네 보며 다른 말씀을 하셨다.
“박 명아, 우리가 3월 3일 너의 집으로 MT가면 밤새도록 해야 하잖아.”
“선생님, 저 보기보다 연약한 여자예요. 저 밤새도록 못 해요. 1번 밖에 못해요.”
밤을 세워가며 얘기할 거잖아, 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선생님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폭소를 터트리고 내 옆에 앉은 노동운동하는 후배와 문우들은 나의 어깨를 치며 박장대소하고........
다른 년의 첫사랑 얘기는 지는 서로 손만 잡는 영혼의 사랑을 하자고 남자친구와 굳게 약속을 했는데 그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잤노라고 나쁜 놈이라고 침을 튀며 흥분한다.
“이 년 이거 아주 나쁜 년이네. 야, 너 귀신이야. 육체가 없는 영혼하고만 사랑하겠다고? 그럼 귀신을 사랑하지 왜 궂이 인간을 사랑해? 내가 보기에 나쁜 년은 너다. 왜 사랑하는 사람을 구차스럽게 너를 속이게 만들고 다른 여자와 자게 만들지? 그게 네가 외치는 사랑이냐? 그런 네가 난 하나도 순결해 보이지 않거든, 그러니 입 닥쳐.”

그러다 이차로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선생님께서는 ‘당신도 울고 있네요. 잊은 줄 알았었는데...’라는 노래를 부르며 감상에 빠진다.
“지 노래 하는구먼. 선생님, 그 년은 울고 있지 않거든요. 그러니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응, 맞아. 내가 그년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야.”
수줍게 웃는 50이 넘은 선생님의 얼굴이 소년처럼 순수하다.
'아...... 저 길을 잘못 든 세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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