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2006년12월28일 제641호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과
▣ 사진 박승화 기자
신영복에 대한 오해가 만만치 않다. 신영복에 대한 일부 개혁·진보 인사들의 부정적·소극적 평가는 ‘진보’에 대한 편협한 정의와 상황·여건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건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한다. <교수신문> 2006년 9월26일치에 실린 ‘탈이념 시대의 진보 신화’라는 기사에 소개된 익명의 평가 5개를 인용하겠다. 내용이 다소 중복되기도 하는 긴 인용이 되겠지만, 신영복에 대한 오해를 넘어서야 참된 진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의 중요성을 감안해 꼼꼼하게 검토해주시기 바란다.
신뢰가 죽은 사회에서 진보는?
△ 신뢰와 성찰의 미덕을 강조하는 신영복은 가급적 비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그래서 일부 진보파는 그에게 구체적인 입장이나 답안,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이 없다고 불평한다. |
(평가 1) “신영복 교수는 진보가 아니다. 신 교수의 저작 내용이 현재 KTX 여승무원 문제, 한-미 FTA에 대한 ‘진보’ 입장과 크게 입장을 달리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에 대한 구체적 입장이나 답안이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누가 신 교수의 저작을 읽고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을 느끼겠냐.”
(평가 2) “신영복 교수는 ‘진보적 상징’이라기보다는 ‘어른’이다. 그가 학계나 대중에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각박하고 경쟁 위주인 현실에서 한숨 돌리면서 사색할 수 있는 사색의 인도자, 지혜로운 어른 정도다. 그렇기에 그의 저작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
(평가 3) “사실 신영복 교수의 학문적 연구성과라는 것은 사회과학적 맥락에서 보면 전혀 없지만 이는 신 교수가 살았던 시대, 한국 현대사가 만들어낸 우리 ‘지식인의 초상’이기 때문에 그런 시대를 살아낸 ‘어른’에 대한 경외감은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 ‘그러한 것’보다 신비화되는 측면은 있고 이는 경계할 부분이다.”
(평가 4) “신 교수의 이론을 실제 사회 대안으로서 적용하려면, 그래서 낮은 사람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도록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주장이자 사상들이다. 현실은 감옥 속의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나은 상황과 평균적 이해와 속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복잡한 사회인데, 선생님께서 감옥이라는 현실과 동질성이 떨어지는 곳에 오래 머물렀다는 점, 또 학교라는, 사회와는 다른 세계에 오래 있어서 현실적 대안과 구체적 답을 원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답을 줄 수는 없다.”
(평가 5) “나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의 말씀이 조금씩 추상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선생님의 ‘관계론’이 소통되는 방식은 좀 ‘존재론’적으로 느껴졌다고, 그래서 선생님의 사상이 ‘고통의 바깥자리’에서 교양의 한 자락으로 변모돼가는 것을 느꼈다고, 세상의 악한들에게도 열려 있는 선생님의 너른 품이 속 좁은 내게는 문득 안타깝기도 했다고, 나는 그렇게 고백하고 싶다.”
위에서도 지적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영복에겐 ‘구체적 입장이나 답안’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 ‘현실적 대안과 구체적 답’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을 생각을 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한국의 지도층 인사나 엘리트 계급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는 늘 한 자릿수와 10%대를 오락가락한다. 진보건 보수건 민중은 ‘출세’한 그들을 믿지 않는 것이다. 공적 신뢰가 무너진 세상이다. 그런데 일부 진보파는 신영복에게 ‘구체적 입장이나 답안’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이 없다고 불평한다.
신뢰가 죽은 사회에서 진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보수에게 타격을 입힐 대안을 강구하는 것인가? 민중이 믿지 않는데도 진보의 비전과 대안을 역설하는 사람이어야 하는가? 신뢰의 문제를 외면하고 벌이는 그런 ‘대안 노름’은 문자 그대로 사상누각(沙上樓閣)은 아닐까? 신영복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신뢰받는 집단이 있습니까. 대학? 대학교수? 전혀 신뢰받지 못합니다. 문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 안 끼는 곳이 없어요. …정치권, 종교계, 법조계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신뢰집단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 보이는 모습이 어떤 것이지요. 상대방을 흠집 내서 자신이 신뢰받으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엄청난 내부 소모를 겪고 있습니다.”
△ 87년 민주화 항쟁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두세 번의 집권으로 이어졌다.이제 새로운 진보 프로그램이 요구된다(사진/ 연합) |
누가 누구를 이끈단 말인가
진보파는 그런 ‘내부 소모’를 필요악으로 본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필승’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진보적 지식인의 역할은 그런 ‘필승’을 위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아우성친다. 물론 그 덕분에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탄생했다고 볼 수도 있으니, 그게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두 정권이 보인 한계에 대해 아무런 성찰도 없이 또 한 번 무조건 ‘필승’해야 한다고 외치는 모습이다.
‘신뢰’와 ‘성찰’의 미덕을 강조하는 신영복은 가급적 비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신영복의 그런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역할 분담’으로 이해하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다. 한 사람에게 모든 걸 기대하려는 ‘영웅 만들기’ 게임의 유혹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지금 정작 하려는 말은 그건 아니고, 그런 신영복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땐 행간의 의미를 읽는 게 필요하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다.
“196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굉장히 능력 있고 진보적인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그들과 헤어져 감옥에 있는 동안 내내 그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출소한 직후에 제일 먼저 물어본 게 그 친구들의 근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가 하나도 없더군요. 다들 출세했더군요. 그 대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별 능력 없어 보였던 친구들, 사명감이 아니라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참여했던 이들,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더라고요. 제게는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이끌고 나가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큰 잘못입니다.”
내 나름의 직설법으로 해석해보겠다. 신영복은 ‘진보의 사유화·이권화’를 지적한 것이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의 독설을 빌리자면,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 물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까지 훼손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민주화운동 세력이 2번 또는 3번의 집권을 했지만 민중에겐 큰 실망을 안겨준 게 분명한 이상, (평가 1)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이야말로 이미 현실 적합성을 잃어버린 옛날 이야기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진보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가 되었으며, 그 전제는 ‘성찰’과 ‘신뢰’라는 게 바로 신영복표 진보의 핵심이다. 누가 이 중요한 문제를 신영복만큼 일관되고 끈질기게 역설했는가?
신영복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각박하고 경쟁 위주인 현실에서 한숨 돌리면서 사색할 수 있는 사색의 인도자, 지혜로운 어른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란 (평가 2)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선 안 된다. 그 ‘사색’에 담겨 있는 진보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모색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진보를 ‘이끄는’ 입장에서만 말할 뿐 ‘이끌림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다. 상투적인 민중예찬과 실질적인 민중모독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의 문제를 외면한 진보는 허구라는 게 신영복의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가장 절실한 아픔과 기쁨은 모두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관대한 사람과 오만한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관대한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입니다. 오만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오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게는 결코 오만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관대한 사람인지 오만한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보다 약한 이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 오만한 진보는 가능하지 않다.신영복의 이같은 강의도 우리는 제대로 소비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
“우리 사회는 고집이 센 사회”
지금 신영복은 ‘오만한 진보’는 원초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보수’의 구도 이전에 ‘오만-관대’의 구도가 진보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더 적절하다는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진보’로 출세한 이들에게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눈물이 있는가? 공감과 눈물은 사회과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무시해야 하는가? 진보의 ‘진영 강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끼리끼리 뜯어먹는 데만 골몰했던 건 아닌가?
(평가 3)은 신영복의 학문적 연구성과라는 것은 사회과학적 맥락에서 보면 전혀 없다고 했는데, 그 이전에 학문이건 진보적 실천이건 그걸 지배하는 기존 사회과학의 틀을 의심해볼 수는 없을까? 그 사회과학이란 것도 수입품이거나 보세가공품 아닌가. 신영복이 이런 문제 제기를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단지 ‘어른’에 대한 경외감으로만 그를 대해야 하는가? 오히려 ‘신비화’를 걱정할 필요조차 없이 ‘어른’에 대한 경외감을 아예 버리고, 신영복을 대담한 도발자로 보는 게 더 옳지 않을까?
신영복이 겪은 20년20일간의 감옥 생활이 갖는 한계를 지적한 (평가 4)에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발상의 전환일 것이다. 위 평가들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건 ‘전투적 일상에 매몰돼버린 진보’의 모습이다. 근본과 더불어 크게 보는 법을 놓쳐버린 타성의 정치일 수 있다. 신영복의 이론은 실제 사회 대안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대안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지적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토대 없는 대안에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평가 5)는 “세상의 악한들에게도 열려 있는 선생님의 너른 품이 속 좁은 내게는 문득 안타깝기도 했다”고 고백했는데, 이는 “대립과 갈등만 있을 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라는 신영복의 고민을 비켜간 고백은 아닐까? ‘세상의 악한’을 무력하게 만들거나 소외시키는 게 진보일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그건 옳기 때문에 무조건 실천해야 할 그런 일인가?
그런 의문에 대해 신영복은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쌓아온 역사의 결론”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사회는 흔히 말하는 것처럼 ‘젊은 사회’가 아니라 ‘굉장히 나이 많은 사회’라고 했다.
“지난 세월 동안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온 사회거든요.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를 지고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지요. 이렇게 나이 많은 사회라서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셉니다. 우리 사회가 처한 대립과 갈등의 문제를 풀어가려면 이런 전제, 즉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센 사회다’라는 것을 먼저 수긍하는 태도가 우선 필요하다고 봅니다.”
위와 같은 진단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악한’에 대해 무조건 이기는 게 좋은지 그것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게 신영복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한쪽에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쪽에 어린 시절 강가에서 코피를 씻던 나처럼 좌절하는 사람도 있으니까”라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노 정권 사람들 간의 이전투구를 보라
이런 말이 현실과 동떨어진, ‘고통의 바깥자리’에서 교양의 한 자락으로 변모돼가는 담론으로 여겨진다면, 정작 현실과 동떨어진 건 바로 그런 생각일 수 있다는 반론을 펴고 싶다. 민중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던 노무현 정권은 한 자릿수 지지를 받는 ‘식물 정권’으로 전락한 가운데 민중은 노 정권에 대한 환멸과 반감을 한나라당과 ‘박정희 신드롬’을 껴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연 민중이 생각하는 ‘세상의 악한’은 누구인가?
신영복은 ‘승자 독식주의’ 진보를 공격한 것이며, 그 내용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편 가르기’와 ‘적에 대한 증오’ 등과 같은 진영 의식에 사로잡혀 늘 ‘남 탓’만 하면서 외쳐대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는 그의 메시지가 현실적이지 않으면 무엇이 현실적이란 말인가? 문제는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교양’으로만 간주하거나 소비하려 든 우리 모두에게 있는 건 아닐까? 한때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끈끈하게 보였던 노 정권 사람들 간의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보라. 늘 사람을 강조해온 신영복에게 ‘사람 얘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판이야말로 비현실적인 게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는 신영복을 제대로 ‘소비’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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