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0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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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커피매거진_손인수 |
여행이란 떠남과 만남의 낭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재발견이었습니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숲> 중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라는 역설이 이마를 때린다.
신영복(61) 교수는 68년 통혁당 사건으로 20년을 복역하고 88년 8월 15일에 석방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집으로 돌아왔지만 담장 밖의 ‘세상 멀미’를 가라앉히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7년의 칩거 후 신 교수는 95년 가을부터 혼자서 다닐 수 있는 ‘독보권(獨步權)’을 되찾은 해방감으로 조국 산천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1년 뒤 그의 여행은 바다를 건너 외국으로 이어진다. 그의 말처럼 일반적 의미의 ‘여행’을 처음으로 해 본 것이다.
여행을 떠나면 자신과 더욱 가까워진다. 내딛는 걸음을 따라 지난 일들이 시간 순서 없이 떠오른다. 자신의 모습을 어느 때보다 가깝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신영복 교수의 여행도 그러했을 터였다. 그렇지만 책으로 묶여 나온 그의 엽서(‘나무야 나무야’, ‘더불어숲’)에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누구라도 쉽게 쓸 수 있는 성격의 글이 아니었다. 드라마틱한 무용담은 아닐지라도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는 오랜 성찰의 흔적이 또렷했다.
커피 맛이 어떠세요? 입맛에 맞으세요?
사실 난, 자판기 커피에 익숙해 있는데 이 커피도 먹어보니 괜찮군요. 커피, 하니까 감옥에서 10여 년만에 맛봤던 커피가 떠오릅니다. 면담차 교도소 직원 방에 갔더니 커피를 한 잔 타주더군요. 향기가 참 구수했습니다. 맛도 물론 좋았고요.
올해 회갑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68년 내가 구속됐을 때 부모님이 회갑이셨어요. 결국 나 때문에 회갑연을 하지 못하셨죠. 내 나이 때 자식과 생이별을 하셔야 했던 부모님의 마음을 떠올렸습니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지만요.
어떻게 자라셨는지 궁금합니다.
경남 의령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은 교사이셨죠. 초등학교 졸업 후 밀양으로 이사해 중학교를 마치고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부산상업고등학교였어요. 교사 월급으로는 줄줄이 자식을 모두 대학에 보내는 게 무리였기에 부모님께서는 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나 또한 부모님 뜻을 따르려 했지만 선생님들이 적극 만류하시더군요. 결국 선생님이 끊어준 기차표를 들고 서울로 올라와 시험을 치렀어요. 학비가 면제되는 수석합격이 아니면 안된다는 각오였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어요. 합격은 했지만 진학은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사실을 아신 아버님이 등록금을 손에 쥐어 주시더군요.
“꽁꽁 얼어붙은 하늘을 치달리는 잡념을 다듬고 간추려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겪었던 하나하나의 일들과 만나고 헤어진 모든 사람들의 의미를 세세히 점검하는 겨울밤을 좋아합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59학번이시죠?
2학년 때 4.19를 맞았고, 3학년 때 5.16을 겪었습니다. 4·19와 5·16 사이 약 1년의 시간은 신동엽 시인의 시처럼 “잠시 푸른 하늘을 보았던 시절”이었어요. 억압된 사회에서 벗어난 열린 공간에서 노동동맹, 교원노조, 6.25 피학살자유족회 등 억압구조 속에서 억눌려 있던 민중의 염원이 다양한 조직으로 발현되었죠. 4.19혁명은 단순한 부정선거에 따른 이승만 정권의 집권연장 실패가 아니라 그동안 억눌리며 축적된 민중역량이 표출된 결과였다고 봅니다.
민중의 억압구조를 인식하고 실천하기 위한 써클활동은 대학원에서도 계속됐어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강사일을 하던 중 통혁당 사건이 터졌고, 내가 이끌던 모임도 여기에 연루돼 결국 구속되기에 이르렀어요.
여느 매체의 인터뷰처럼 이런 질문을 하게 되네요. 28세의 젊은 나이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으셨으니 견디기 힘든 충격을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암담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뿐이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와 같은 무기수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 공부밖에 모르고 자라 관념적이고 창백한 인텔리에 불과했던 나에게 감옥은 분명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낮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사회모순 구조를 다시금 인식하게 됐습니다.
“피라밋을 거꾸로 세웠을 경우 그 꼭지점이 땅에 닿는 자리, 즉 피라밋의 전중압(全重壓)이 한 점을 찌르는 바로 그 지점에 교도소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도소는 사회의 모순 구조와 직결된 공간임으로 해서 전 사회를 향하여 활짝 열려 있는 공간이라 믿고 있습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낮은 곳으로 떠난 20년의 여행
그는 가족 곁을 떠났다. 결코 낭만일 수 없는, 추억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 없는 감옥생활. 그를 감옥으로 이끈 것도 ‘사람’이었지만, 다시 그를 일으켜 세운 것 역시 ‘사람’이었다. 창백한 손, 인텔리로서의 부끄러움과 반성이 이어졌다. 낮게 이르니 딛고 있는 땅과 그곳의 사람들이 자세히 보였고 그들의 숨결이 가감 없이 전달됐다.
“교도소는 15척 벽돌 벼랑으로 둘린 외딴 섬이라 불리웁니다. 나는 이 무성한 잡초 속에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몸 기대며 어깨를 짜며, 꾸준히 박토(薄土)를 배우고, 나의 언어를 얻고, 나의 방황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여행도 어찌 보면 방황이 아니던가. 무언가를 찾기 위한 구도자처럼 그는 직선으로 마음껏 걸을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길을 떠났다. 그 길은 사람과 사람 사이, 즉 관계(關係)의 길이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관념의 짐은 덜고 겸손의 손을 내미는 횟수가 많아졌다. 희망의 최후 보루는 사람이라는 결론은 그렇게 내려졌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라 탓해도 좋았다. 사람이 꼬아 논 실타래를 푸는 것 역시 사람인 것을.
“바늘구멍으로 황소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는 이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를 알려는 태도가 못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
“획(劃)과 획 간에 자(字)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인(人)과 인(人) 간의 그 뜨거운 ‘연계’ 위에 서고자 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아래로 낮추면 풀 한 포기, 벌레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더욱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를 말이겠는가. 삶은 ‘더불어 사는’ 것이라는 그의 끈끈한 연대의식은 20년 여행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솝의 거북이와 토끼 이야기도 그에겐 연대의 틀에 따라 새롭게 해석된다. “능력이 있다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친구를 얕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친구를 따돌리고 몰래 혼자만 1등을 하는 거북이 같은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 잠든 토끼를 깨워서 함께 가는 거북이가 되자.”
교수님께서 석방되자마자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내용을 보면 단순히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는 내용은 아니던데요.
그곳에서 배운 것이 많았지만 무기수로서의 세월은 잃어버린 시간과 같습니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었지만 무언가 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검열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다 쓰지 못하고 행간에 묻힌 이야기들이 많아요. 지금도 그 글들을 읽어보면 쓰지 못한 기억이 아프게 떠오릅니다.
집필 여건이 열악했기 때문에 늘 머리속으로 다음 편지에 쓸 내용을 가다듬으며 외우다시피 해 편지 쓰는 제한시간 안에 주룩 써 내려 갔어요. 석방 후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편지에 고쳐 쓴 흔적이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가족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한 사람의 고통이나 불행도 다른 사람의 고통, 불행과 연결돼 있다는 점입니다.
“겨울밤 단 한 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밤잠의 권리는 없다던 친구의 글귀를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불행이란 그 양의 대분분이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같은 서간문 형식으로 쓰신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또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어찌되었건 보통 사람들과 달리 20년을 감옥에 갔다 온 주제에 세상을 상대로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한다는 게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정해놓고 그에게 얘기하고 그 내용을 독자들이 듣는 형식이면 친근하면서도 덜 거만하게 보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한 신문사의 제의로 조국의 산천을 찾아볼 기회가 주어졌고, 그 여정이 끝나자 바로 해외여행으로 이어졌어요.
“갇힌 사람들에게 ‘출소’의 가장 큰 의미는 ‘독보(獨步)’입니다. 혼자서 다닐 수 있는 권리를 그곳에서는 ‘독보권’이라 하였습니다. 가고 싶은 곳에 혼자서 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해방감이었습니다.”
-<나무야 나무야> 중
국토와 세계로 이어진 여행
그는 독보권을 만끽하며 국토와 해외를 여행했다. 담장 밖 여행은 그에게 유별난 감회를 안겨주었다. 그렇지만 그 여행은 20년 담장 안 여행의 결과물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사람, 관계 그리고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 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옛 사람들은 ‘무감어수(無鑒於水)’의 경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만 그것이 바로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감어인(鑒於人)’.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과의 사업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보기를 이 금언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무야 나무야> 중
90년대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중의 하나가 ‘세계화’다.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고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앞다투어 세계로, 세계로 향한다. 신 교수는 해외여행을 통해 이같은 현상이 우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고 안타까워한다. 더불어 가지 못하고 누군가가 이끌고, 이에 이끌리는 모습이 눈에 밟힌다.
미국에서 벌어진 테러참사와 뒤이은 보복공격. 전쟁의 고리는 20세기를 끝으로 떨어지지 않고 21세기에도 이어진다. 피의 악순환 속에 ‘서로에 대한 겸손한 이해’는 설자리가 없다.
“유적지에서는 물론이고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도 그러한 최선의 결정(結晶)들이 여지 없이 깨트려지고 있는 현실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깨트리는 것은 외력(外力)이었습니다. 근대화, 세계화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여행은 돌아옴(歸)입니다. 나 자신으로 돌아옴이며 타인에 대한 겸손한 이해입니다. 정직한 귀향이며 겸손한 만남입니다. 이 정직한 귀향과 겸손한 이해가 없는 한 서로 다른 세계가 평화롭고 평등하게 만날 수 있는 길은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숲> 중
그의 편지와 엽서를 다 읽고 나서야 어렴풋이 그의 ‘여행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여행은 어쩌면 68년 감옥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표지에는 ‘통혁당 사건 무기수 신영복의 편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무기수. 겪어보지 않고선 아무리 애를 써봐도 그 고난과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를 이야기하는 데 여전히 무기수, 감옥, 20년 등의 단어를 사용하기가 곤혹스럽다. 더욱이 단지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는 포장에 가려 그가 성찰한 결과물들과 앞으로 성취할 것들에 대한 평가가 퇴색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신 교수는 주석을 달지 않고 우리의 전통과 정서를 감안한 독특한 형식으로 경제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말한다.
그의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여행을 통해 자신을 돌이키며 무기수가 아닌 경제학자의 자리를 넓혀 갈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을 묻기보다 그가 성취할 것들에 대해 겸손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격려하는 것은 그와 더불어 살아갈 우리들의 몫으로 남는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커피 매거진_대담기사(2001년 11월)
글·손인수 / 사진·김온 onnie11@castnet.co.kr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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