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12-0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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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정숙씨 세상과 바람나다_미래를소유한사람들 |
김정숙 저 |
* 본 글은 신영복 선생님의 저서에 실린 글이 아니기에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신영복,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더불어 삶, 숲을 닮은 정치”
정숙씨, 신영복 선생님을 만나다
정숙 씨는 오늘 인터뷰에 관한 부담을 덜었다. 정말로 선생님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 뵌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좋은 말로 격려해주시던 선생님이었다. “지혜를 주세요!”하는 정숙씨의 SOS 요청에, 선생님은 일단 여태까지 인터뷰했던 사람들에 대해 물었다. 정숙씨는 임순례 감독, 김지나 디자이너, 사회자 김제동 씨, 가수 이은미씨, 만화가 윤태호씨, 배우 손숙 씨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을 만나 그 분야의 주요한 현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가만히 듣던 신영복 선생님이 웃으셨다. “나는 문화 예술인은 아닌데”
“선생님은 사회문화계 전반적인 멘토로 모신 거죠. 각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을 만나보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는 사회, 배려와 예의 있는 사회에 대한 갈망이 컸어요. 이제까지 경제적인 부만 쫓다 보니 지치고, 우리가 과연 잘 살고 있는가 회의가 든다는 거예요. 이 시점에서 전체적인 부분의 성찰이 필요한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그들이 한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인정할 것. 눈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작기 때문에, 약하기 때문에 소외 받는 가치들을 끌어올려 공정한 경쟁 사회를 만들 것. 1등이 되는 것보다 질 좋은 사회를 고민할 것. 결국, 사람이 우선시되는 사회, 강자나 약자나 누구나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 신영복 선생님이 늘 얘기하는 더불어 숲,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사회에 관한 이야기였다.
당대에 스승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정숙(이하 김): 선생님 만나면 마음이 평안해져요. 저희는 매번 전전긍긍 갈등하는데, 선생님은 어떤 문제든 쉽고 부드럽게 이야기해주시니까.
신영복(이하 신) : 저도 속상하고 그런 거 많죠. 참고 표현 안 하는 것뿐이지.(웃음)
김: 선생님이 늘 강조하시는 사람 이야기, 관계 이야기에서 많이 위로를 받았거든요. 오늘도 맨토로 모시고 좋은 말씀 들으러 왔습니다.
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표가 있거나 멘토가 있으면 참 좋죠. 근데 최근의 멘토에 관한 논의가 많습니다만 문제도 있다고 생각해요. 멘토라는 개념 자체가 낡은 틀이 아닌가 해요. 이를테면 계몽주의적인 프레임이지요. 기존의 어떤 가치를 멘토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오히려 제약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우려하지요.
제가 사회과학개론 강의에 들어가요. 1학년 과목이거든요. 재 작년이든가 수업 시작하면서, 앞에 앉은 학생에게 몇 학번이야? 물었더니 09학번이래요. 내가 59학번이야.(웃음) 50년의 간극이 있잖아요. 내 강의는 참고만 하라고 했어요. 앞으로 20, 30년 후를 살아갈 사람들이, 59학번의 이야기를 멘토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죠.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적인 가능성을 열어가야 하는데, 전시대 사람들의 가치와 정서가 모범이 된다는 것이 과연 옳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해마다 스승의 날이 오면 가끔 스승 대접을 받아요. 하필 금년에는 5월 15일에 수업이 있는 날이었어요. 또 교단에 서서 노래 들어야 되나 걱정이었어요(웃음). 스승의 날에 이야기했어요. “스승은 당대에는 없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볼 수 있듯이,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도를 넘는 비난, 비방을 하지요. 현재 시점에는 스승이 없고, 역사 속에만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은 연암이나 다산을 그 시대의 자부심으로 느끼지만, 당대에는 사표가 아니었어요. 죄인이었어요. 심지어 다산이 강진 읍성에 당도해서, 서문에서부터 수없이 문을 두드렸건만 한집도 열어주지 않았어요. 결국 동문 바깥의 밥집에서 방을 얻게 되요. 당대에는 당장의 이해관계 때문에 스승이 없죠.
스승이라는 사표가 있으면 참 편해요. 사람도 제일 배우기 쉬운 게 사람이거든요. 더구나 전인격적인 사표가 있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참 도움이 되겠지만 불행하게도 화석화된 역사적 사표만 존재해요. 제가 멘토다 사표다, 스승이라는 말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지요. 다만 이러저러한 삶의 경험들이 참고는 된다. 이렇게 가볍게 받아들이는 조건이면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김: 선생님 경륜이나, 선생님의 책 속의 여백을 통해 다시 한번 내 생각을 돌아보게 되거든요. 현존하는 사표가 없다고 하시지만, 저는 스승으로 존경합니다.(웃음)
20년 간의 ‘대학’생활, 머리부터 가슴까지의 여행
신: 사람들이 저에게서 가장 많이 읽어가는 부분이 20년의 감옥생활입니다. 제 삶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수형생활을 통해 참 많은 걸 배웠어요.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만날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사회도 배우고 역사도 배우고 최종적으로는 인간에 대해 성찰할 수 있었지요.
문제는 제가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이에요. 감옥 속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옥중 서간문인데, 독자들이 그 책을 통해서 저를 바라보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워요. 그 책에는 속상하거나 괴롭거나 이런 이야기를 일체 안 썼어요. 그 편지의 수신자가 걱정하는 부모님과 가족들이라 그런 얘기를 쓰지 않은 것이지요. 또 제가 쓴 편지는 교도소 당국의 검열을 거치니까, 내가 괴롭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 하는 오기와 고집도 없지 않았어요. 그런 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진짜 내 모습을 못 보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대 나이로 감옥에 들어가셨잖아요. 얼마나 화가 나고, 답답했겠어요. 그런데 그 심정을 아름답고 절제된 문장으로 풀어 쓰고, 그 20년의 시간을 스스로 발전시키는 데 썼잖아요. 감옥에 갔다고 사람들이 다 변화되어 나오는 게 아닐 테니까요. 그 속에서 어떤 일을 겪으면서, 상황을 받아들이고, 겸손한 자세로 살 수 있었을까. 그래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신: 사실은 처음 5년 정도는 감옥에서 동료 재소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어요. 제가 해방 후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근대적 교육을 받은 세대잖아요.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내가 사람을 보는 관점 자체가 근대적인 틀에 갇혀 있었어요. 징역초년의 동료재소자에 대한 인식이 그랬습니다. 재소자는 사회 룸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다. 사회 변동기에 오히려 반동적인 흐름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는 집단이다. 같은 처지의 동료 재소자라는 인간적인 관계를 차치하고, 일정한 거리 바깥의 존재로 대상화하는 거죠. 타자화하고 분석하고. 이게 근대 사회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이잖아요. 그걸 제가 하고 있었어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죄명이 뭐지? 형기는? 결손 가정인가? 이런 식이었어요.
그 사람들 역시 겉으로는 조금도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가 자기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돌이켜 보니까 오히려 내가 ‘왕따’였지 않았나.(웃음) 징역살이란 좁은 공간에서 함께 부딪치며 살아가지요. 어차피 참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되요. 긴 긴 겨울 밤에 저마다 자기가 살아온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이야기해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사를 듣고 나면 ‘나도 저 사람과 같은 부모 만나서 저런 인생을 살았으면, 똑같은 죄명으로 여기 앉아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대상화하고 분석하던 생각이 공감과 이해로 바뀌게 되지요. 그러기까지 한 5년 걸렸던 것 같아요. 전 이걸 ‘머리로부터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표현해요. 아마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겪는 가장 먼 여행이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후에는 그들과 정말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내었어요.
20대 후반에 감옥에 들어간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절대로 만나지 못했을, 정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거기서 만났다. 북에서 공작원으로, 안내원으로 내려온 사람들, 중국 혁명 과정을 겪었던 사람들, 해방 전후에 격동기를 살았던 할아버지들…… 그분들이 청년 신영복에게 많은 이야기를 남겨주었다. “좋은 학교 나왔다고 하고, 똑똑해 뵈기도 하니까(웃음) 본인들은 얼마 있지 않으면 세상을 떠나지만, 자기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 했어요.”
신영복 선생님이, 20년 간 감옥에서 보낸 시간을 대학시절이라고 이야기하는 까닭이 이 때문이다. “정숙 씨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잖아요. 만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물론 타자로서 만나게 되지만, 그 타자가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줘요. 만나서 나를 비춰보는 거울로 나를 성찰하게 되는 거죠. 이게 근데 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사회적인 윤리라고 봐요. 사회의 다양성을 승인하고 존중하자는 똘레랑스잖아요. 그런데 살아가면서 머리에서 시작된 여행이 가슴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어요.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 현장의 중요성을 깨닫다
김: 그건 어떤 계기로 그런 생각을 했나요? 가슴에서 어디로 여행을 계속하셨어요?
신: 책에도 소개한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나이 많은 목수 할아버지가 나에게 집 짓는 법을 설명하면서 땅바닥에서 집을 그려 보였어요. 주춧돌부터 그리고 지붕을 맨 나중에 그리는 거예요. 우리는 지붕부터 그리잖아요. 일하는 사람들은 집 짓는 순서대로 집을 그리는 것이었어요. 저는 학교 선생 아들로 태어나서 학교-교실-책, 이런 데서 자기 생각을 훈련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게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똘레랑스나 공존은, 이런 거예요.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나는 지붕부터 그릴 테니, 그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합시다. 이건 냉정한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이에요. 공존이라는 것 자체가 타자를 바깥에 세워둔 거죠.
그때부터 변화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차이는 공존할 게 아니라, 그 차이를 통해 나를 성찰하고,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감사한 기회로 받아 들이자고요. 출소한 이후에 탈근대 철학서적들을 보니까, 그것을 변화로 이어지는 노마디즘, 유목주의라고 표현하더군요. 근대가 구축한 완고한 틀을 넘어서면서, 가슴으로부터 발까지 또 하나의 긴 여행을 시작했어요. 발이란 건 삶의 현장을 의미하죠.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은, 다른 사람을 공감하고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나무라고 할 수 있어요. 발까지의 여행은 그 나무가 숲이 되는 경지겠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겪었던 이런 20년 간에 내밀한 과정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요, 궁극적으로는 부단한 자기 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죠.
김: 20년, 대체 그 긴 시간은 어떻게 버티셨어요?
신: 단기수는 만기날짜가 정해져 있잖아요. 그 날짜를 손꼽아 기다려요.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가면 좋은 것이지요. 반면 무기수는 오늘 내일이 지나간다고 달라질 게 없어요. 출소 날이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의미 있어야 되요. 인생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빨리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지요.
교도소에서도 한 달에 한번 영화를 보여주었어요. 오래된 옛날 영화였어요. 옛날 영화 속에서 세월이 흘러가는 걸 이렇게 묘사했어요. 벚꽃이 가득히 피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 다음 눈이 내리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번 더 반복합니다. 다시 꽃이 피고, 또 눈이 와요. 그리고는 화면 가득히 ‘십 년 후’라는 큰 자막이 뜹니다. 그러면 재소자들이 전부 와! 하고 탄성을 질러요. 내가 탄성을 지르는 친구를 붙잡고, 내일 아침이 바로 ‘십 년 후’가 되면 좋겠냐고 물었어요. ‘그게 말이라고 하냐.’길래, ‘단 조건이 있다. 당신이 지금 서른 셋인데 내일 아침에 마흔 다섯의 나이, 마흔 다섯의 육체로 출소한다고 해도 좋겠냐?’ 얼른 대답을 못해요. 비록 감옥에 갇혀 있는 십 년. 고통스러운 십 년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생에서 지워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지요. 더 빨리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을 도로의 정서라 하고 하루하루의 과정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려는 자세를 길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도로의 정서는 이를테면 자본의 논리입니다. 속도와 효율성이그 속성이지요. 도로는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전부지요. 길의 마음은 그렇지 않지요. 길은 그 자체가 아름다워야 하지요. 사람도 만나고, 길섶의 코스모스도 만나고, 자기 발자국도 남기고.
김: 저 같으면 ‘내 인생은 왜 이럴까’ 한탄하며 보냈을 텐데. 선생님은 그 안에서도 부단히 그 삶의 의미를 생각하셨군요. 그 안에서 선생님은 삶이란 걸 어떻게 받아들이셨어요?
신: 제가 무기징역을 살아가면서 터득한 게 아, 하루하루가 보람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인생이 뭐냐고 묻는다면, 인생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라고도 할 수 있고, 인생은 공부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끊임없이 공부해요. 공부란 것은 생명이 존재하는 형식이에요. 제가 학생들한테 비바람 치는 나뭇잎에 올라 앉아있는 달팽이 그림을 보여줘요. 달팽이가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는지 봐라. 더듬이를 뻗어서, 천둥, 번개 비, 자기 몸체보다 큰 물 폭탄을 맞으면서 세계를 공부하고 있다. 모든 생명은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다. 물론 1등만 살아남는 경쟁세계에서 입시공부 열심하는 것도 나름대로 공부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부가 결국 여러분에게 무엇을 안겨주는가 그리고 우리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가는 가를 물어보지요.
김: 선생님은 학자시니까 공부라고 표현하고, 우리들은 인생을… 겪어내는 것이다라고 하죠.(웃음)
신: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공부라고 하면 당연히 수험공부죠. 텍스트를 습득하는 걸 공부라고 생각하니까 지겨워 하죠. 진짜 공부는 정말 깨닫는 거거든요. 하루하루 깨달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건데.
관계에 성장과 생명을 부여하는 모성성의 가치
김: 선생님. 하루하루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유독 와 닿아요. 요즘에 저는 제 앞에 있을 일을 계획하거나 마음 먹기가 어렵거든요. 선거가 가까워올수록 주어진 일정에 맞춰 움직이느라 바빠서요. 내일 당장 어떤 일을 해야지 계획하기도 어려워요. 저는 제가 선거에 나선 것도 아니고 문재인 후보를 도와주는 거잖아요. 내가 잘해서 힘이 돼야지, 그런 입장으로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어쩔 때는 내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아침이 힘들게 느껴지기도 해요.
신: 돕는다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야 내야 하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여성성이라고 비하하는데 무엇인가를 키워내는 것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론 모성이나 여성성이라는 것이 봉건제사회의 가부장적 문화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결국은 부권의 종속개념으로 되어 있어서 지양되어야 할 문화이고 가치인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탈근대의 과제와 함께 이 여성성, 모성을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자의 희생 위에 자기를 배타적으로 강화하는 것과 자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들을 아울러 키워내는 것 중에 어느 게 더 가치 있는 것일까요. 이 판단은 어렵지 않잖아요. 저는 죽임과 전쟁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의 모성성이 탈근대의 키워드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탈근대의 과제는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이 바로 존재론이지요. 개인이건 집단이건 국가건 자기존재성을 배타적으로 강화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존재론적인 세계질서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게 양극화 반복되는 금융위기 등으로 지금 입증되고 있어요. 존재론을 관계론의 패러다임으로 바꿔내는 것, 이게 모든 분야에서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김: 저도 저보다는 함께 잘 사는 관계론적인 삶을 지향하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관계를 우선시 생각하면,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 거에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면 도와주는 게 편한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런 선의를 당연하게 여기고 고마워 하는 마음도 없잖아요. 더 뻔뻔한 요구를 하기도 하고요.
신: 나쁜 사람이 먼저 출세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그래서 양극화가 진행되는 이런 구조가 사실 문제죠. 이걸 바꿔내야죠. 어디서부터 깨고 들어가야 할지 굉장히 어려운 과제이긴 합니다. 사회적으로 큰 계기들이 역사적으로 문득문득 와요. 문제는 그러한 계기들을 뼈아픈 성찰로 받아들이지를 못해요. 80년 광주항쟁, 87년 민주화투쟁, 97년의 IMF사태, 2008년의 금융위기, 2009년 노 전대통령의 투신, 등 우리 사회 근본을 흔들 만큼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이것이 우리 삶의 문제와 직결된 것으로 성찰해내지 못하는 게 문제에요. 물론 이것은 완고한 기득권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사태를 개량국면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지요. 어쨌든 역사 발전의 성찰의 계기로 만들지 못했던 것이지요.
독재 가까이에서 이해되는 권력의지
김: 정치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인데, 지금은 기득권을 지키는 방식으로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사전적 의미로 정치는 국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고 행사하면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정치에 관한 어떤 정의를 갖고 계세요?
신: 정치에 대한 아주 고전적인 개념이지만, 제가 좋아하는 글귀가 있어요. ‘정자정야’(政者正也)라고 논어에 나옵니다.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라는 거죠. 뭘 바르게 하느냐? 정본(正本), 뿌리를 바르게 하는 거죠. 뿌리가 바를 때 나무가 잘 성장할 수 있어요. 한 사회의 뿌리는 그 사회가 가진 잠재적 역량입니다. 그걸 극대화하는 게 정치의 기본이라고 봅니다. 자원의 배분에서부터 인권, 교육, 문화, 경제 등 그 사회의 잠재역량을 최대화함으로써 아름다운 나무로 키워내는 게 정치죠. 지금은 권력을 장악하는 것, 권력을 재창출하는 것이 정치이지요. 더구나 그 권력은 지배권력이구요. 이처럼 잘못되어 있는 정치 구조를 바꿔야 하지요.
어제도 정치권의 몇 분을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만, 우리나라는 과거의 보수적인 구조가 완고하게 남아있는 정치구조입니다. 조선시대 후기의 노론 중심의 구조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눌려있는 뿌리를 바르게 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가 아닐까 싶어요. 특정 정당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거나, 그걸 다시 재창출하려는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해요. 최근의 정치현실을 목격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란 게 참 중요하다. 정치가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구나 많이 깨달았어요. 이런 열망들을 잘 결집해서 그야말로 접혀있고 눌려 있는 우리 사회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키워낼 수 있는 제도, 정책들 만들어 내는 게 시급하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2012년의 정치, 대선 과정은 참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선생님, 저는 이런 갈등이 있어요. 사람들은 문재인 후보에게 권력의지가 없다는 얘기를 해요. 권력 의지라는 것은, 뭔가 잘해보겠다는 것이라기보다 내리누르는 것,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 보이겠다’는 식의 의미인 것 같아요. 보수라는 사람들은 그 점을 문 후보가 힘이 없다는 말로 뒤집어 씌우는데,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아요. 권력이라는 게 필요한 곳에 나눠지고 각각 존중돼서 올바른 긴장관계를 갖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적재적소에 긴장감 있는 균형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보거든요. 아직까지도 어떤 사람들은 독재일지라도 박정희 시대처럼 몇몇 희생되더라도 끌고 갈 수 있는 힘. 그걸 원하는 게 아닌가? 그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고, 젊음을 바치고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죠. 이 모순성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 오랫동안 권위주의적인 정치구조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비민주적 문화가 남아있는 건 사실이고, 또 그것이 기존의 지배권력을 재창출하는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방식은 전혀 아니라고 봐요. 젊은 세대들은 일방적인 지배권력보다 소통을 통한, 합의하고 함께 가는 문화에 더욱 친숙하다고 봐요. 리더쉽보다는 펠로우쉽, 이런 정서로 이미 바뀌어 있다고 생각해요. 과거의 권위주의 적인 생각에 젖어 있거나 그런 향수를 자극하는 기득권 정치세력들은 새로운 리더쉽에 흠집을 내고 있지만 이미 낡은 방식이에요. 더구나 젊은 세대들은 이미 그런 방식으로는 이끌고 갈 수는 없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변화했습니다. 특정 정치집단이 정보를 독점하고 끌고 가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라졌지요. 일방적 지배보다는 가버넌스. 소통과 합의. 이런 것들이 정치인들의 미래적인 품성으로 평가 받아야 하죠.
김: 좋은 대통령은 어떤 대통령일까요?
신: 쳐다보기에 참 좋은 사람…
김: 아홉 시 뉴스에 나오길 기다려지는 사람일까요?(웃음)
신: 사람들이 개인적인 욕망을 대통령에게 투사해서 뭔가 기대했었어요. 돈 많이 벌어 성공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자기도 비슷하게 부자가 될 수 있을까,하던 환상이 산산이 깨졌잖아요. 정치권에 대한 불신도 더 높아졌지요. 정치권 바깥의 비정치인에 대한 기대가 더 높지요. 그것은 제도정치권 전반에 관한 국민들의 불신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잘살게 해주겠다, 나라를 엄청나게 바꾸겠다고 약속하는 대통령 보다는 비록 잘 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사람과 고생을 함께 해도 괜찮은 사람. 한마디로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사람들이 지키지 못할, 현란한 공약들에 대해서는 크게 현혹되지 않으리라고 봐요. 인간적인 신뢰감. 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불안을 함께 안고 걸어가겠다는 신뢰가 있는 사람. 비단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김: 참여정부 때 육군 장성으로 계시다가 제대하신 분이 일반인 신분으로 인천 제물포에 일이 있어서 갔대요. 그때까지는 모든 사람이 다 해줬는데, 막상 혼자 가니까 주머니에 돈이 있는데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래요. 선생님은 20년 만에 나온 세상이 어떠셨어요. 교류는 해왔어도 막상 너무 변한 도시 속에 나왔을 때 당혹감도 있었을 것 같아요.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신: 20년의 간극을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질문이지요?. 물론 문화적인 충격도 컸습니다. 참 많이 변했으니까요. 그러나 사회과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세상의 외형적 현상은 참 많이 변했지만, 사회의 근본구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확인을 하기도 했어요. 그렇더라도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완충기가 필요하기는 했습니다. 눈 수술한 사람이 붕대를 한 겹 씩 풀잖아요. 천천히 풀자.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대면하자. 다행이라면 감옥 속에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났던 경험 때문에 사회 나와서 보는 시야가 편협하지 않았어요. 낙후되고 변화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무심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것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어요. 사람이란 자기와 가까운 사람, 편한 사람 만나기 좋아하지. 싫어하는 사람은 피하게 되요. 전 그래서 몇 군데 포스트를 만들어놔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반드시 만나려고 노력해요. 지금도 교도소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들과도 대학동창생으로 만나기도 하고 성공한 대학동창들도 만나고 지역, 진보보수 등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편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요. 사회의 외형이나 특정 선진부분에 시선을 빼앗기기 않기 위해서도 접촉국면이 다양해야 된다고 생각하지요.
김: 그래서 선생님 사고에 깊이 매료되고 닮고 싶고, 스승으로 삼는 것 같아요.
신: 아마 많은 사람들이 갇혀있다고 생각해서 제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리라고 봐요. 미셸 푸코가 사회를 감옥이라고 말하잖아요. 사실입니다. 그 분이 얘기하는 것 중에 <감옥이란 무엇인가>가 있어요. 앗! 감옥은 내가 전공인데(웃음)하고 읽어봤어요. 아주 명쾌해요. 감옥이란, 원래 사회에서 범죄자들을 격리 수용하는 물리적인 공간이잖아요. 푸코는 감옥이란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들은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는 착각을 주기 위한 장치라는 거예요. 공장, 병원, 기업, 대학, 군대 등 근대 사회를 이루는 모든 조직이 그런 감옥 구조를 갖고 있다는 거죠. 거기 갇혀 있으면서도 갇혀있다는 자각을 못하게 하는 강력한 포섭기제가 있어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갇혀 있습니다. 니체는 오죽하면, 철학은 망치로 하는 것이고, 우리의 생각이 갇혀 있는 그 틀을 깨는 것이 철학이라고 했겠어요. 교육문제, 돈 문제, 경쟁해서 이겨야겠다는 강박 등 우리가 갇혀 있는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 강력한 망치가 필요하지요. 함께 깨뜨려 나갈 수 있는 정치적인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중심부에서도 변방의식으로 꾸준히 자기 성찰해야
김: 그렇다면 어떻게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최근에 선생님이 쓰신 책 『변방을 찾아서』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이 말하는 변방은, 기존의 가치나 체제를 전복시키고, 창조적인 생각이 빚어지는 곳이잖아요.
신: 그렇죠. 변방의 창조성. 변방이 덜 갇혀요. 중심부는 자기 구조를 그대로 재생산 하려고 그러죠. 징기스칸이 그랬었지요.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가는 자는 흥한다고. 부단히 변화해야 합니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 변방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결집할 수 있는 사람이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김: 변방에 있는 사람도 있지만, 중심부에 제 역할이 있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이렇게 중심부에 놓인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자세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신: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 역시 변방 의식이 필요해요. 끊임없이 자기 성찰, 자기 변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만 중심부에 위기가 오지 않아요. 그것이 없는 경우엔 거기 갇히게 되죠. 변방이라는 게 공간적인 변방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에요. 중심부에도 비판적인 변방이 반드시 있는 거거든요. 변방이라는 의미가 그런 공간적 지리적 개념에 갇힐 까봐 저는 변방성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변방성을 견지하려면, 무엇보다 역사적인 관점이 있어야 돼요,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그리고 우리가 지금 불변이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현실구조마저도, 역사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역사의식이 있어야 해요.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그 부분을 간과하기 쉽지요. 자기의 이해관계가 중심부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도리어 중심부의 구조를 지키고 그것을 재생산하려고 하지요. 그러다 보니 모순이 누적되고 사회 위기가 오고, 한마디로 물 흐르는 듯한 사회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충격적 국면으로 가는 거죠.
김: 선생님, 변방성을 가지려면 중심부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우리나라는 특히 학벌, 빈부격차 등 바깥에서 설정한 중심 개념 때문에 정서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선생님은 어떠셨어요? 선생님도 그런 콤플렉스를 느끼고 극복하신 경험이 있나요?
신: 콤플렉스가 있으면 변방이 중심부보다 훨씬 더 완고한 틀에 갇히게 되지요. 조선시대의 역사나 현재의 우리현실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를 청산하는 것이지요. 제 경우는 좀 복잡해요. 2중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저의 중심부 의식은 일단 감옥 들어가면서 깨뜨려졌지요. 특이한 것이라면 감옥이라는 변방으로 밀려나면서 중심부에 대한 컴플랙스보다는 도리어 동료재소자들에 대한 컴플랙스를 갖게 되기도 했었어요.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생각을 키워온 사람들의 유연한 사고가 부러웠어요. 교도소에서 담배를 못 피잖아요. 담배가 비싸요. 그래서 직원 사무실에 청소하러 들어가는 이들에게 지상 명령이 떨어져요. 남은 꽁초를 가져오게 시켜요. 물론 직원들도 이를 알고, 재털이마다 물이 가득 채워져 있어요. 근데 물에 빠졌지만 다행히 안 풀어진 담배꽁초가 있거든요. 맛은 심심하지만, 그것도 말려서 피우기도 하고 팔기도 해요.
물에 빠졌다가 말린 그 꽁초를 뭐라고 부르는 줄 아세요? ‘심청이’(웃음) 그 작명의 예술성에 감탄했어요. 그런 게 한 두 가지 아니에요. 함께 있던 사람이 출소하고 난 저녁이 되면 그 빈 자리를 보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얘기해요. 보통은 ‘이 자식, 지금쯤 여자 끼고 술 한잔 하겠네.’할 법한데 그들은 그렇게 얘기 안 해요. 아주 문학적인 표현을 해요. ‘이 친구 오늘 치마 걸린 방에서 자겠네.’(웃음) 단어나 문맥에 갇혀 관념적인 사고를 하고 있던 저로서는 정말 콤플렉스를 느낄 정도였어요. 생각하면 제 경우는 콤플렉스든 중심부 의식이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발견하고, 깨뜨려온 것 같아요.
두 시간 누릴 수 있는 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다.
김: 선생님은 항상 이 사회의 어른이라고 불리시는데요. 사회의 어른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보시나요?
신: 우리 사회가 극도의 좌우, 진보보수로 나뉘어, 소통이 단절된 담론 지형을 갖고 있죠. 그래서 제 자신이 사회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분들이 해야 될 일이 바로 이러한 단절된 의식구조를 허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걸 뛰어넘기 위해서 ‘경계에 서겠다.’고 얘기하는 후배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입장이 옳지 않다고 얘기해요. 경계에 선다는 것은 좌우, 진보보수로 분절되어 있는 세계를 승인하고,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경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한 개인 속에도 우와 좌가 공존하지요. 자동차를 타고 우회전만 계속하면 절대로 전진할 수 없고 제 자리로 돌아오잖아요. 좌회전도 마찬가지에요. ‘시중’(時中)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물리적 중간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중간이란 뜻입니다. 때로는 우로 치우친 지점이나 주장이 중간일 수 있고 때로는 좌로 치우친 경우가 중간이기도 한 것이지요. 분절되고 대립하는 담론지형을 허물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이 소위 사회지도자들의 소임이라고 봐요. 그러나 이러한 구조가 옳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것이 지배권력을 유지하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계속 재생산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깨뜨리는 일을 소위 어른들이 해야지요
김: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님은 과연 언제 행복을 느끼시는지 궁금해요.(웃음)
신: 어떤 사람은 그러더라고요. 백화점에서 명품 구입할 때 열반을 느낀다고.(웃음) 저는 소비나 소유보다는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때 가장 행복해요. 또 한편으로는 저처럼 엄청난 일(?)을 겪은 사람들은, 꼭 행복해야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아요. 감옥 독방에 있을 때 하루 두 시간, 신문지 만한 크기의 햇볕이 들어왔어요. 그 햇볕을 무릎에 받고 있을 때 참으로 행복했어요. 비록 감옥에 갇혀있지만 이 두 시간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더 많은 욕구와 욕망에 괴로워하는 것 역시 사실은 자본이 만들어 낸 거예요. 가끔 길 걸어가다가, ‘앗, 내가 혼자서 독보하고 있구나.’ 깨달을 때, 마침 그때 햇볕까지 쫙 비치면, 아..! 행복하다. 느끼죠.(웃음)
<선물>
최근 몸이 불편하셨다는 선생님 소식을 듣고 정숙 씨는 전복상자를 선물로 챙겼다. 항상 좋은 말씀으로 길을 제시해주시는 선생님이 건강을 회복하기를 위한 마음이었다. “근처에 초복도 있었고요. 집에 가서 사모님하고 드시라고요. 전복이에요.” 선생님은 고맙지만 받은 걸로 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라는 말로 손을 내저으신다. 그 바람에 잠시 전복상자를 주고 받느라 잠시 훈훈한 실랑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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