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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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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은 벚꽃이 지면 여름이 온다.
그 만큼 벚꽃이 늦게 핀다.
흐드러진 벚꽃이 눈처럼 내리던 어느 날.
트랙터를 몰고 작년에도 밭을 갈아 준 나와 동갑인 친구가 왔다.
예의 ‘벗어라’ 라고 말했던 녀석이다.
고라니의 장례 이후 열에 들떠 있던 난, 흰 벚꽃이 붉은 색으로 보이고 있었다.
제 딴에는 이장의 전화를 받고 바쁜 와중에도 밭을 갈아 준다고 왔는데 아프다고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벗어라’ 이후에 처음 보는 것이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겨우 치켜들고 안간힘을 다해 나갔다.
그러지 않아도 벌써 아픈 몸을 이끌고 이른 아침에 두 번 씩이나 퇴비를 사러
운전을 하고 왔다 갔다 한 터이다.
어지러움증에 눕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다. 넌 아직도 고자냐?”
“별소릴........”
녀석은 지난 번 일이 생각났는지 쑥쓰러운 듯 웃는다.
“넌 좀 야윈 것 같다...어디 아프니?”
파리한 내 얼굴을 보고 근심스러운 듯 묻는다.
“늙어서 공부하려니 힘들어서 그렇지, 뭐.”
“욕심 부리지 말고 쉬엄쉬엄해. 그런데 어느 밭을 갈려고?”
“작년에 갈았던 밭하고 앞에 밭  좀 갈아 줘.”
난 어지러움증에 더 이상 말을 계속 할 수가 없어 그렇게 부탁하곤 허둥지둥
집으로 들어왔다.
잠시 누워 있었으나 마음은 편하지 않다.
아무리 친구라도 일을 시켜놓고 마냥 누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억지로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고 밭으로 내려가니 녀석은 트랙터에서 내려와
밭의 비닐을 벗기고 있었다.
“밭에 비닐을 안 벗겼네.......”
밭으로 내려오는 나를 쳐다보며 불만을 터뜨린다.
“어제 벗기라고 시켰는데.......”
이 일을 어쩌나........하는 생각에 곤혹스러워진다.
“완전히 벗기지 않고 드문드문 벗겼는데.......우린 이렇게 비닐을 안 벗기면 일 안해.
트랙터 몰고 그냥 가버려.”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소리를 녀석은 역시 하고 만다.
“그래, 그게 기계가진 놈들의 곤조지! 친구 밭에서는 일 좀 해도 돼!”
난 짐짓 큰 소리를 친다.
“뭐라고? 하하.......”
녀석은 사람 좋은 웃음을 웃는다.
그렇게 말해 놓고도 나는 밭에 뛰어들어 열심히 비닐을 벗겼다.
땀이 온 몸을 휘감더니 밭 위로 뚝뚝 떨어진다.
“명아야, 너 그 옷이 잘 받는다. 이쁘게 보이네.........”
아파서 파리한 얼굴에 열에 들떠 으슬으슬 오한이 나, 삼복더위의 개 혓바닥처럼 늘어진 겨울 쉐타를 입은  50이 다 된 여자에게 하는 녀석의 립 서비스다.
“난 원래 이뻐! 그래도 일 값 더 안 줄 것이니 빈 말 하지 마!”
“친구에게 일 값 받는 사람도 있냐? 일 값 계산했으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다.”
녀석이 부담스러운 소리를 뱉는다.
이럴 때 박명아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00야, 너 내가 그렇게 좋니?”
진지해진 내 목소리에, 갑자기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밭에 드문드문 박힌 돌을
빼내던 녀석이 나를 쳐다본다.
“좋으면 여기까지! 바로 좋은 친구로 유지하는 거야. 사람들은 욕심 때문에 자기만의
특별하고 아주 각별한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 하지만 만들어 놓고 보면 그 또한 좋은 것만은 아니야. 자신의 삶의 특별한 반경 안에 들어오면 바램과 기대와 욕심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그 특별함 때문에 더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해. 서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관계, 서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관계, 서로 욕심 내지 않는 관계, 봄이 되어 네가 트랙터를 몰고 오면 난 순수하게 마냥 고마워하고, 아무 대가 없이 나의 밭에 비닐을 걷어 주는 것이 고맙고, 이렇게 우리는 좋은 관계로 늙어 죽을 때까지 좋은 친구로 영원히 만날 수 있고,바로 여기까지! 여기까지가 좋은 거야. 여기서 더 나가면 애증의 관계가 되는 거야.애증의 관계는 부인 하나면 족한 거지. 거기서 또 한 명을 늘릴 필요가 없잖아?애증의 관계는 나중엔 잘못하면 서로 껄그럽거나 원수가 될 수도 있어. 아니면 아주 애절하고 슬픈 관계가 되던지........좋은 관계로 남기엔 힘이들지....."
“왜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지!”
녀석은 나의 말에 반박한다.
짜식, 감히 박명아 말에 반박을........
하지만 저렇게 나 좋다는 놈을, 트랙터도 잘 몰겠다, 비닐도 잘 벗기겠다,
힘도 세서 돌도 잘 옮기겠다, 농사도 잘 짓겠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
요즘 머슴도 귀한데,그냥 확 데리고 살아버려,하는 생각이 잠시 든다.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지금 열이 너무 높아 제 정신이 아닌 게야....
궂이 사용가치 교환가치를 따지지 않더라도 박명아가 농사 때문에
남자와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많이 아픈 것이 틀림 없구나....

“수작하지 말고 아저씨! 비닐이나 벗겨!
00아, 난 네가 고등학교만 나온 부인을 대학까지 공부시켜 학원 선생님을 만들고
성실히 너의 가정을 돌보고, 열심히 일해서 너의 집안을 일으켜 세운. 그런 너를 존경해. 만일 네가 옆길로 나간다면 난 실망할 거야. 그러니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자! 그건 그렇고, 우리 막걸리나 한 잔씩 마시고 하자.”
어지러운데다 땀까지 흘리니 곧 쓰러질 것 같았다.
시원한 막걸리가 열에 들뜬  뜨거운 목젖으로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막걸리를 들이키며 올려다 본 하늘은 벚꽃이 눈처럼 지고 있었다.
“이렇게 벚꽃이 지는 것을 보니 곧 여름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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