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고 반가운 내 친구들

by 장경태 posted May 23, 200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 - Up Down Comment Print
엊그제 우리 ‘천수국민학교’ 2반 반창회를 했다. 졸업한지 27년만인가? 우리는 동네별로 1반과 2반으로 나누어져 졸업 때까지 주욱 6년 동안을 같은 반으로 함께 지냈으니, 나는 친구들 이름과 얼굴을 당연히 기억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천수국민학교는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까지는 기억나는데 그게 양곡리인지 신리인지는 모르는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이다. 공식적인 행정구역과 동네 사람들의 생활권 차원의 지리적 위치가 다른데서 오는 혼돈이다. 일테면 버스정류장은 양곡버스정류장인데 행정구역은 신리에 해당하는 뭐 그런 곳에 딱 우리 학교가 있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형, 동생들이 나온 학교는 작년에 폐교가 되었다.

그때 우리 반이 50여명 쯤 된 듯 싶은데, 엊그제 모인 친구들은 그중 30여명이 모였다. 이렇다 할 애경사 없이 한 녀석이 애써 주선한 것인데, 거기 모인 친구들 모두가 이렇게 와준 것에 놀라고 반가운 분위기였다. 얼굴의 주름과 허리띠에 늘어진 배, 벗겨진 머리, 거기다 객지에서 살아가느라 얻은 연륜들로 인해 중년의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대학을 나온 놈들은 남자가 여섯 정도(나는 지하철에 들어와서 대학이라는 데를 갔으니까 제외하고), 여자는 가장 공부를 잘했던 친구 하나가 2년제 전문대를 나온 것이 전부였던 걸 보면 우리 사회의 여자들의 지위가 어땠는지를 우리 친구들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었다.

포크레인 기사, 덤프트럭 모는 녀석, 안양에서 시내버스 운전하는 친구, 카센타, 고물장수, 정육점, 식당, 선반 몇 대 놓고 작은 공장을 운영한다거나, 봉제공장에서 일하기 등등. 우리 친구들 중에는 그 흔한 공무원이나 교사가 하나도 없었다. 대학을 나온 친구들 몇 정도가 고만고만한 회사의 월급쟁이고 중학교 졸업하거나, 또는 그 마저 졸업도 못한 친구들은 거의가 자영업을 하고 있는 그들의 삶은 우리 사회의 생계형 자영업자 계층의 출신 배경, 학력과 같은 사회자본 혹은 문화자본이 취약한 사람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임 장소 또한 인천의 부개역에서 택시 타고 15분 쯤 들어간 새로 급조성된 아파트촌의 어느 상가라는 장소의 상징 또한 '중심'에는 한 번도 들어가지 못한 우리들의 사회적 지위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었다.

생애주기로 보아 요즘 말하는 87년 6월 항쟁 세대가 딱 우리일 텐데, 우리들 누구도 거기에 합당할만한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 역시 이후 이름이 붙여진 386세대도 아니었다. 나는 그때 가리봉동 5거리의 (그곳의 행정구역은 구로동) 어느 공장에서 사출기를 돌리면서 먹고 자고 있었다. 우리 친구들도 87년 6월 열기의 주역인 ‘넥타이부대’와는 먼 곳에서 각기 사느라고 고생들 하고 있었던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없는 우리사회 대다수 민중의 하나였다. 그나마 나 정도가 박종철의 죽음에 마음 아파했고 리영희 선생의 책들을 읽고 있었던지라 사회와 역사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 내 친구들 대부분의 기억에서 87년은 그리 뚜렷하게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아마 신영복 선생님을 아는 친구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도시에서 기반을 잡느라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중이었으며 시련을 이겨내느라 고생을 하던, 역사의 능동적인 주체였던 적이 없었고 역사는 늘 그들을 비웃거나 소외시키고는 하던 김소진 소설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 나오는 '밥풀떼기'들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학력이 부족해서 군대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이들에게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운동은 고향의 산에서 나무하다가 저 멀리 산 넘어 읍내 쪽에서 들려오는 서울가는 가는 기차의 기적 소리 정도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6월의 한가운데 있었던 친구는 전경으로 있다가 화염병으로 부상을 당해 아이를 갖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우리의 87년 6월은 이러했다.

나는 그래도 전태일이나 박종철을 만나고 갖게된 어떤 부채 의식 때문에 운동단체에서 기웃거렸는데, 거기서 만나는 사람마다 첫 마디가 몇 학번이냐고 묻는 운동권의 ‘문화’가 참으로 당황스럽게 했었다. 지금도 그곳에서 만났던 아무개 형들의 진짜 이름이 무얼까 생각하면 그리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당혹스러웠던 것은 그 단체에서 크게만 보였던 형이 민주화의 열기가 사라질 무렵인 몇년 후에 삼성생명 보험들어달라고 내가 일하던 신도림역에 찾아왔을 때였다. 여하간 이런 동네에 우리 친구들 같이 공부의 끈은 짧지만 정이 많고, 순수한 친구들이 함께 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91년에 들어간 서울지하철은 87년 6월 항쟁의 바람이 하나도 불지 않은 느낌이었다. 최루탄과 함성으로 범벅이었던 바로 그 등잔 밑이나 진배없는 서울역, 종로, 을지로, 충무로의 지하철역에 있으면서도, 나의 선배들의 삶과 6월 항쟁은 무척 멀리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 내 친구들이 6월 항쟁과 어떤 기억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 서운하거나, 그들을 나무랄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 집보다 더 가난했던 얼굴이 까맸던 친구는 타이어표 검정고무신이 닳을까봐 늘 양손에 쥐고 다녔었고, 축구를 할 때면 가난에 하나도 기죽지 않고 맨발로 운동장을 누볐었다. 내가 기억도 못할 정도로 어린 시절에 그의 아버지는 한겨울에 술에 취해 동사를 하셨다. 동네 사람들이 ‘전대포’라 불렀을 정도로 술을 드셨던 건 한국전쟁 때 한 중대급이 전투에 나가면 3명 4명이 살아돌아오고, 전우가 죽고 부상당하고, 또 당신이 상대방을 죽여야만 했던 기억 때문이었다는 것을 친구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3학년 때 누나가 돈을 벌던 서울로 가야만 했는데, 불쌍한 내 친구가 학교는 제대로 다니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걱정과, 막내아들에게 주지 못한 사랑을 별이 되어 젖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얼마되지 않아 부모님의 뒤를 따라간 형의 몫까지도 대신해서 잘 살아주기를 빌고는 했었다. 친구들 말로 청계천 봉제공장과 청량리 어디 쯤에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간간이 듣고는 했었다. 바로 그 놈이 “경태야 나는 시를 쓰고 싶었다”하는 것이었다. 너무도 많은 아프고 깊은 사연을 갖고 있기에, 그리고 우리 동네 친구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그 깊은 정감이라면 시가 아니라 무엇을 하더라도 잘 할 친구기에, “야, 나도 신문배달하고, 사출기 돌리고, 목재깎고 하면서 살았다. 답답해서 책을 읽었고, 서른에 공부를 시작했으니,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거 해봐라. 늦지 않았으니” 나는 정말 그 친구가 시를 쓰면서 자기를 구렁으로 몰아넣은 우리 역사와 사회와 그의 팔짜와 진정으로 화해하는데 도와주고 싶다.

농사짓고, 배를 타느라고 공부라는 것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우리 친구들. “야. 내 딸이 친구들하고 버스에 타면, 공짜로 태워준다. 난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으니 내 딸은 정말 공부를 제대로 시키고 싶어서, 연장근무도하고, 쉬는 날도 없이 무사고 17년 운전”하고 있다는 시내버스 운전사 내 친구 상현이. 공부하거나 운동한다는 주변에서 너무도 자주 듣고 보는 '이혼'이 우리 친구들에게는 하나도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식구들 건사하는 책임감에 제 각기 열심히 사는 우리 사회의 아버지들이 된 내 친구들, 설령 사회구조나 역사에 대해서 모르지만 고루하게 보수적이지도 않고, 지금의 세태처럼 자기잘난 멋을 취하지도 않으며, 자기 중심적으로 따지지 않고 넉넉한 인정과 착한 심성으로 살고 있는 친구들이 참 고맙고 자랑스럽다. 반갑다 친구들아.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