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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7.10.05 06:54

가을 곁의 푸른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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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더니 시계바늘이 7시를 넘고 있다. 벌떡 일어나며 아들이 자고 있는 방을 향해 악을 썼다.
“재홍아! 재홍아! 학교 늦었어! 어서 일어나!”
악을 쓴 것은 아들보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내 자신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아들은 주섬주섬 자신의 자리에서 몸을 빼더니 수건을 챙겨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야! 너 오늘은 시간 없으니 노래 듣지 말고 몸만 씻고 얼른 나와!”
화장실에서 자신의 손 전화로 매일 아침 음악을 들으며 샤워를 하는 아들에게 악을 쓴다.
올해 중 3이 된 녀석의 얼굴은 무성한 여름의 여드름 밭이다.
“너의 얼굴은 정말 구제불능이다. 어쩌면 좋으니…… 야채를 많이 먹어야 얼굴의 여드름이 덜 나고 피부가 깨끗해지지. 엄마는 여드름 하나가 없었는데,”
나의 말에 무시로 일관하겠다는 뜻인지 녀석은 묵묵부답이다. 잠에서 깬 것이 못내 서운한, 아직 잠을 몰아대지 못한, 화가 잔뜩 올라 있는 녀석의 뒷덜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사춘기다. 샤워를 마친 아들은 밥을 먹고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며 밥 먹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공들여 드라이로 머리를 매만진다.
“좋아하는 여학생 생겼니? 대충해라, 늦었어.”
“……”
나의 말에 무시로 일관하겠다는 자세다.
“멋있게 보일 여학생이 없으면 그만하고 일어서. 늦었다.”
그래도 아들은 자신이 마음에 들 때까지 머리를 매만지고 일어서더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갑자기 아들의 흰색 상의와 단정한 감색 바지의 교복 밑으로 알록달록 총천연색 양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 눈 속으로 들어섰다.
“도대체 그건 어디 패션이니? 정말 촌스러워서 못 봐주겠다. 요즘 그런 양말이 유행이니?”
“내가 사는 곳이 촌인데 촌스러운 거야 당연하지, 뭐!”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정체성을 확실히 하겠다는데 어쩌랴.
“오늘은 늦어서 자전거 못 타고 가겠어. 엄마가 좀 태워다 줘.”
“꾸물거리던 폼새가 그럴 줄 알았다! 그러니 빨리 하지 그랬어!”
언성을 높이며 이층에 자고 있는 딸을 향해 목젖을 세웠다.
“소윤아! 소윤아! 일어나서 재홍이 데려다줘. 오늘 엄마 아침부터 수업이 있어서 데려다 줄 수가 없어.”
“야! 넌 왜 매일 아침마다 꾸물대고 난리니!”
잠이 덜 깬 얼굴로 부스스 내려오던 딸이 현관 옆에 서 있는 동생을 향해 악을 쓴다. 딸이 제 동생을 태우고 나간 후 서둘러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집 앞 밤나무 아래 낮 익은 등짝이 보인다. 이장 부인이 엎드려 밤을 줍고 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밤나무 아래 이장 부인의 등짝이 보이는 것을 보니 가을이 온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매년 어김없는 그녀의 행동에 슬그머니 얄미운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야박스럽게 밤을 줍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은 빨리 머리에서 지우는 것이 상책이다. 차의 속도를 높여 달렸다. 달리는 속도만큼 잊는 속도가 빨라지길 바라며.
그렇게 달린 덕분에 예정보다 학교에 일찍 도착한 아침 시간은 널널하게 여유가 있었다. 첫 시간은 명작 읽기와 글쓰기 시간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나생문’과 ‘덤불숲 이야기’, 노브그리예의 ‘질투’를 읽고 개인의 이기심과 시선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동일한 사건에서 각자 처해진 위치에 따라 보는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주제였다. 그 것은 결국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류노스케의 주장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완벽한 논리는 아니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겐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주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노브그리예의 ‘질투’는 남편이 부인에게 느끼는 질투의 감정에 대해 전혀 감정을 가지지 않고 객관적이고 사실적이고 치밀하고 섬뜩하게 부인의 일거수일수족을 감시하는 남편이 부인에 대한 시선을 시종일관 논리정연하게 묘사하고 있는 글이었다. 인간이 그토록 완벽하고 냉정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니, 징그러울 정도로 섬뜩했다. 나같이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움직이는 감정적인 인간은 백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될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나는 나의 감정에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던가,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에 격하게 감정적이고 급한 나의 성격으로 나는 얼마나 무수히 내 발등을 찍었던가. 그런 내 자신이 꼭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닌데……나이가 들어도 왜 눈에 띄게 나아지질 않는 걸까, 이런 저런 생각에 조금 우울해졌다.
중간 휴식 시간에 어느 것을 마실까, 자판기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져 조금 늦게 교실에 들어왔다. 내가 없던 사이에 프린트가 돌려졌었나보다. 내 옆에 앉아있던 여학생이 내가 허둥대며 들어와 자리에 앉자 그제야 나의 존재를 의식한 듯 당황했다.
“어떻게 해요. 프린트를 남겨두지 않고 그냥 다 뒤로 보냈어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지요, 뭐.”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녀의 무심함과 무신경에 조금 화가 난다.
칠판을 보고 5항목의 문장을 프린트에 적어 넣으라는 교수님 주문에 되도록 나의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적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막상 객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적으려고 노력하니 적을 것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객관적이란 것은 글조차도 어렵다는, 새로운 것을 깨닫고 배운다.
수업이 끝났다. 점심시간이다. 하지만 중간 휴식 시간에 우유를 마신 덕분에 시장기를 느끼지 못한다. 집에서 가져온 자몽을 먹으니 밥 생각은 머리에서 배에서 멀리멀리 달아난다. 배에다 무엇을 집어넣기 위해 식당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이 귀찮아진다. 배가 부른 탓이리라.
점심을 걸러 시간이 남은 틈을 이용해 세무사 사무장에게 전화를 했다.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럴 줄 짐작하고 있었다.
‘ 이놈이 이 따위로 일을 처리하고 약속조차 지키지 않고 전화를 받지 조차 않다니, 이놈을 내가 그냥 놓아두나 봐라.’
입 속에 들은 자몽을 이빨이 아플 정도로 힘주어 씹으며 전화기 버튼을 누른다.
“자기야, 세무장 놈에게 전화도 안 오고 받지도 않네. 자기가 걸어서 이놈 좀 죽여 놔!”
난 킬러를 고용한 듯 그에게 전화를 걸어 죽이라고 흥분한다.
“어제 전화를 했으니 일단 사무장 전화를 받아보고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들어보고 결정할게.”
언제나 이성적인 그는 침착하고 차분하다.
' 이 인간도 노브그리예가 그리는 섬뜩한 인간과 같은 과 아닌가.'
죽이겠다고 같이 흥분하지 않는 그가 서운해 나는 더 화를 낸다.
  “자기는 내 편이야! 그 놈 편이야! 도대체 아군이야, 적군이야! 들어보고 말 필요도 없어! 약속도 안 지키는 놈이 어디 있어! 내가 이놈을 그냥 꽉!”
“내가 알아서 할게. 흥분하지 말고 점심부터 먹어. 점심 안 먹었지?”
  억지를 쓰며 흥분하는 내게 그가 나의 흥분을 갈아 앉히려는 듯 화제를 점심으로 돌린다.
“지금 점심 먹게 생겼어! 점심 생각도 없어. 이게 다 나를 무시해서 하는 짓이야!”
피해의식이 강한 내가 울먹이듯 울분을 터트린다.
“그러지 말고 조금이라도 먹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나의 급하고 감정적이고 욱! 하는 성격을 잘 아는 그가 나를 달랜다.
“……알았어. 먹을게……"
  엉뚱하게 그에게 화를 내고 있는 내 자신이 못났다는 생각과 그에게 미안한 생각에 나는 그 정도 선에서 순순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점심을 먹을 생각은 없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곧 오후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다. 그래도 먹겠다고 대답을 한 터라 무언가를 먹기는 먹어야한다는 생각에 자판기 앞에 선다. 때가 때이니만큼 부드러운 커피를 선택한다. 50원이 비싸다.
‘젠장! 부드러운 값이 50원이나 되나! 세상에 공짜는 없네! 난 엄청 모두에게 부드러운데도 50원 안 받는데!’
금요일 오후 수업은 오전과 같은 교수님의 창작기초 시간이다. 30분 단위로 글을 쓰라는 교수님의 엄명에 난 막막해진다. 더구나 밤에 잘 때도 30분 간격으로 일어나 글을 써보라는 교수님 말씀에 난 진작부터 주눅이 들었었다. 다른 학생들은 다들 해 온 것 같다. 하지만 난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나도 밤 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상적인 것으로 여긴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난, 한 번 잠을 깨면 다시 잠들기가 어려워졌다. 그런데 더구나 30분 단위로 깨어있으라는 것은 온 밤을 온통 뜬 눈으로 밝히라는, 나에겐 고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두려움에 새삼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으로 쓸쓸해지는 가을이다.
세무장이 나에게 받은 돈을 끽소리 못하고 고대로 토해내었다. 단지 그가 점잖게 ‘도대체 당신이 한 일이 무엇이 있는지 납득이 안 된다.’는 말만 했을 뿐이라는데. 한국적 상황에서 남자가 절실하다는 씁쓸한 현실인지 아니면 나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내가 얌전하고 순해서 그렇다는 그의 전혀 설득력 없는 말이 이유인지…… 하긴 나를 생각하여 좋게 말해준, 그의 예의바른 얌전하고 순하다는 말을 바보라는 말로 바꿔 들으면 납득이 전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건 그렇고 나갔던 돈이 생각지도 않게 다시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다.
“소윤아! 엄마 mentor note 가져와!”
나의 외침에 딸은 그 큰 눈을 껌뻑이며 묻는다.
“갑자기 웬 mentor note?”
"네가 그랬잖아? mentor는 정신적 지주라는 뜻이라고, 그러니까 엄마는 신정아처럼 미모와 머리가 뛰어 난 것도 아니고, 변실장처럼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처럼 인격과 학식이 뛰어 난 것도 아니니 그저 들어 온 수입을 mentor note에 적어 놓는 일 외엔 적을 것이 없구나. 나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슬프게도 그 게 지금 나의 가장 정직한 현실이구나.”
그런 나를 보고 ‘또 시작 했네’라는 듯 딸이 나를 쳐다보며 실실 웃는다. 웃는 딸의 얼굴이 가을에 어울리지 않게 푸른 여름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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