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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08.02.25 13:08

나의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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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햇살 만큼이나 활기찬 아침이다. 아마 녀석은 늦게까지 문 앞에서 낑낑거렸을 것이다. 엊그제 손 봐놓았던 그럴싸한 집과, 싸한 밤공기 속에 온기라도 지켜줄 요량으로 넣어준 옷가지들을 마다하고 벗어놓은 털신에 턱을 괴고 나에 대한 원망과 간간히 들리는 산짐승들이 자기 새끼들을 단도리하는 낯선 울음소리에 기억이 가물가물한 지 어미 품을 그리워하다가, 형제들은 어디로 갔을까 싶은 복잡한 심사와 초롱한 별 빛이 어린 생명을 걱정해주는 그런 기운 속에, 또 그렇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나날들의 기억과 산 그림자와 별 빛, 그리고 사람과 오고가는 정감들이 무병하게 자라게 하는 기운일 테다.  

딱한 사연의 녀석을 먼저 쓰다듬어 주고 싶지만 나에 대한 원망은 언제였냐는 듯 여기 저기 엉겨붙은 도깨비풀은 호기심에 못이겨 벌써 뒷산을 탐색하다 급히 내려온 정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녀석의 한쪽 감각은 늘 나에게로 열려 있어 언제든지 반갑게 맞이해줄 자세가 되어 있다. 녀석의 성실성과 작대기로 혼쭐이 나 달아나던 때의 그 서운함을 털어버리고 또 다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그 맑은 심성은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게 한다. 저놈은 또 하루 종일 나와 지근거리를 유지하면서 앞발로 흙을 파내고 코를 들이밀 것이고, 자기 식성도 아닌 봄풀을 깨물어도 보면서,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병아리와 친해보려다 암탉에 혼쭐이 나 견공의 체신을 구기면서 세상의 사태를 깨쳐나갈 것이다. 요사이 햇볕이 부드럽고 길어진 이유는 아마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요것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서였을 터이다.  

걱정과 무력증이 없는 게으름을 누리며, 자본주의적으로 구획된 시간과 공간질서, 인간됨을 잃게 하는 자멸적인 노동규율에서 벗어난 나의 결정은 참으로 훌륭한 결단이었다. 비로소‘나’를 찾아 나와 온전히 맞대면하면서, 생명의 원기로 가득 찬 대지 속에서 나도 그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간다운 삶으로의 복귀이다. 정말 소비자본의 괴물인 서울이라는 내장 속에서 소화기관 역할을 하던 일들이 정말 내가 매일 맞이했었던 생활 이었던가 아득하다. 참, 떠나기를 잘했고, 그런 결심을 격려해준 그 사람이 고맙다.

늦은 아침을 하고, 괭이를 둘러매고 앞 밭을 둘러본다. 나에게 이는 노동이 아닌 산책이다. 뒤켵의 앵두와 배나무의 하루하루 변하는 꽃망울의 변화와 마늘 싹은 얼마나 땅을 밀쳐내고 고개를 드밀었는지, 어제와 다르게 오늘의 밭둑에는 또 어떤 손님들이 세상으로 나왔는지 확인하면서 신기함과 호기심어린 관찰을 기록할 자료들을 모으는 일이 주목적이다. 창으로 햇빛이 드는 거실의 의자에서 오늘의 이 생활을 위해서 꾸려놓았던 책들을 한 권 한 권씩 들추면서 나보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 미처 생각지 못하던 곳으로 여행을 하고, 풀리지 않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하는 즐거운 독서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오늘의 ‘나’가 되도록 밀어왔는지, 지금 보다 더 성숙하고 관대해진 내일의 ‘나’를 만들기 위한 좋은 생활을 구상하다가 나른한 잠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러다가 한 달에 며칠 정도는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이 멀리서 찾아오면 나의 손길이 닿은 채소와 닭이라도 한 마리 잡아 막걸리를 대접한다. 그동안의 구상들을 이런 저런 얘기로 풀어내고, 생각을 다듬는 데 서로 도와주면서 사회적인 일들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렇게 적당한 노동과, 독서와, 이야기와 글쓰기,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뢰와 고마움, 이를 함께 나눌 사람과 인간됨의 삶을 회복하고 사는 삶은 내가 놓칠 수 없는 오래된 꿈이었다. 내가 처한 환경을 문화적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성정이 지나온 내 삶의 과정 속에서 훈육되어 이미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어있다면 무슨 문화적인 시설이 필요하며, 굳이 유명 예술가의 전시회를 찾아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과 한 문제에 대해서 궁리하고 궁리하는 끈기, 떠오른 문제의 기원을 찾아가는 집요함, 이렇게 구워진 문제의식을 사회적으로 의미있게 엮어낼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다면 만나는 모든 것이 나를 재미있게 할 것이고, 성장하게 만드는 문화적인 재료인 셈이다.  

이런 현실적이지 않은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갖게 된 것은 저축이라도 하고, 보험이라도 들고, 풍찬노숙을 피할 정도의 거처를 마련하고, 공부라도 하게 되면서였다. 무턱대고 청빈을 입에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며, 지금과는 다른 환경에 놓여 있을 때 우선 나 스스로를 건사할 수 있는 기술이나 사회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삶은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외려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이 체제의 한 가운데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노릇이다. 구로공단에서 사출기 돌리는 공돌이였고, 신문팔이였고, 대학도 못나온 나에게 길어진 술자리 끝에 따라간 386 형들의 자취방은 도저히 내가 동경했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세 명이 들어가면 꽉 찰 방 한 칸에 비키니 옷장, 석유곤로에 양은 냄비와 쓰러진 술병과 라면봉지, 며칠을 개지도 않은 이부자리를 보면서 나는 운동을 하더라도 저렇게는 안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렇게 멋있었고, 말 잘하던 또 다른 형이 삼성생명 보험들어 달라고 찾아왔을 때, 그들의 거대한 사회에 대적하는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생활의 내용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없었다. 생활 속에서는 삶의 여유가 없었고, 운취를 찾으려는 문화적 갈구가 없었으며, 청빈과 그들의 지조를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정말 그렇게 살면서 운동을 해야 했을까는 두고두고 수수께끼였고, 지금도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들에서 그런 비슷한 아쉬움을 느낀다.

그러나 지금의 세태는 누가 누구의 인생에 인격적 개입을 하는 것을 무지 싫어하는 시대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담배는 끊어라’, ‘바느질 하고 음식 만드는 것도 공부보다 더 중요하다’는 류의 간섭은 손을 놓은 지 오래다. 그저 깨달으면 좋은 거고, 그렇지 못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여하튼 나만이라도 무엇이 옳은 삶인지 나의 길을 뒤돌아보면서 고지식하게 한 발 한 발 나아갈 뿐이다.

이 글은 책에 대한 지독한 나의 병증이 도대체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를 생각하다 나왔다. 2006년도에는 360여 만 원 정도 책을 샀길레 해가 갈수록 지출이 줄어들겠거니 했더니, 작년에 인터넷 서점에서만 641만원의 책을 산 것을 알고는 이거 큰일 났다 싶었다. 그러면 금방 여기저기서 나오는 질문, 그 책을 다 읽냐? 당연히 못 읽지, 다만 효율적으로 읽는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나와 관심분야가 다른 여자를 만나 두고두고 분업해서 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으로 바뀌었다. 비좁아버린 나의 집은 정리하는 걸 포기하게 만들었고, 있는 책을 또 사게 되는 일들이 수시로 생긴다. 이런 병증을 한탄하다가도, 또 다시, 하! 이 주제는 참 재밌겠는데, 왜 사람들은 저런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또 다시 책을 사는 일로 이어진다. 이 나이에, 짧지 않은 직장생활 동안에도 여전히 지적 호기심을 잃지 않음과 정신적으로 늙지 않다는 증표이거니 한다. 나만 앓고 있는 고약한 병인 줄 알았더니 다산 정약용 선생님도 나와 비슷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니, 오래된 벗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모은 책을 싸들고 앞의 먼 발치에는 냇물이 흐르고, 어머니 같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강아지와 병아리와 좋은 사람과 맑은 기운을 기르면서 이 세상을 보내는 일이 내가 바라는 미래의 꿈이다. 지금의 이 삶은 정말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산에 사노라니 일이 없고 한가로워
새로 지은 띠집이 딱 두 칸이라네
방은 겨우 병든 몸 의지할 정도고
들창은 청산을 마주 볼 만큼 냈다네
솔바람 소리는 피리이자 거문고요
푸르른 바위들이 병풍이요 휘장이지
이천 권 서적이 가득 쌓여 있기에
언제나 문에 들어 기쁜 얼굴로 마주 본다네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이끌리오, 209-210.

천수만이 지척에 있는 충청도 고향 집에서 막걸리 한 잔 걸치고 2008년 2월 스므 사흣날 새벽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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