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1989-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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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사회와 사상(한길사) 통권 제15호 |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 만에 가석방된 신영복씨
- 월간 '사회와 사상' 1989년 11월 통권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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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년쯤 감옥살이 할 거라던 것이 20년이나
지난 1968년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1심과 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신영복씨(48). 그는 지난
1988년 8월 15일, 20년 만에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민족분단은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으로 몰아넣었다. 일단 굳게 닫힌 옥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 어느 사회에서보다 한국사회에서의 형량은 엄청난 인플레이션 현상을 보이고 있다. 20대의 청년은 40대가 되어서 비로소
특사라는 형식으로 풀려나올 수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숙대 강사를 거쳐 육사 교관을 하다가 구속되어 일반적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긴
세월 감옥을 살게된 신영복씨의 경우는 이 분단시대의 진보적 지식인이 당하는 수난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감옥에서 밖으로 내보낸
편지들을 밖의 가족과 친지들이 책으로 엮은「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는
89년 1학기부터 성공회신학대학에 출강, 한국사상가 등을 강의하고 있다.
―신선생께서는 이른바 통일혁명당사건으로 잡혀가 수사를 받을 때, 당시 자신이 얼마쯤 감옥살이를 할 것으로 예상했습니까?
우리가 그때 갖고 있던 보안법에 대한 지식은 아주 빈약했더랬지요. 간첩에게나 적용되는 법률이라고 알았지요. 취조하는 사람들이 수사기술상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한 3년 살면 나갈 거라고 그러더군요.
―취조기술상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수사관도 실제로 그 정도로 생각했는지 모르지요. 형벌의 정도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까요. 권력은
스스로를 위해 필요하다면 피의자를 형벌로 옭아넣기도 하고 풀어놓기도 합니다. 형벌이란 또 상대적이라, 같은 행위라도 여기서는 형벌로 다스려지고
저기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지 않습니까. 또 시대에 따라서도 가변적이고요.
우리가 당시 조심스럽게 읽어 문제가 되었던 책들이 지금은 합법적으로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것도 시대적 상황, 역사적·사회적
조건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우리는 한 세대 이전의 사상이랄까 의식구조에 구금된 것이라고 할까요.
―문제가 된 책들이 어떤 것들이었나요?
공소장에 나와 있는 책들을 보면 고리키의「어머니」라든지 마르크스의「독일이데올로기」레닌의 몇몇 저작들과 모택동의「신민주주의론」들이었습니다.
이런책들을 우리는 노트에 번역해서 후배들로 하여금 두서너 벌씩 베껴 돌려가며 읽혔습니다. 이 내용들을 강의는 하지 않았지만 서클활동할 때
관심있는 학생들에게도 읽게 했지요.
―그런 책들을 읽게 되고, 역사현실에 눈뜨게 된 어떤 계기라도 있었나요?
우리에게 4월혁명은 엄청난 것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초에 우리는 4·19가 노독재자의 실정에 의해 유발된 것으로 소박하게 생각했지만 4·19이후
5·16까지의 시기에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구조적으로 인식해갔고, 따라서 이 같은 사회는 원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을 이론적으로 규명해야 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구요, 휴전 이후 초토화된 대학에서 저
개인뿐 아니라 우리 사회는 4·19를 통해 위대한 각성을 하게 됩니다.
―통일혁명당사건이란 도대체 무슨 사건이었습니까? 무엇을 했길래 20년 이상이나 감옥살이를 했나요?
통일혁명당사건을 나도 잘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감옥을 살았던 것은 내가 했던 일보다도 남북의 정치적 상황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나
합니다. 우리가 한 일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연구 모임을 하면서 학생서클들을 조직해 지도했고 나아가 일부 학생시위를 조직했는데, 요즘의
학생운동 수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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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하층의 민중 속에서 서 있었던 세월
―신선생 등이 당시 특별히 추구했던 이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가 경제학을 전공했으니까 더욱 그랬겠지만, 사회와 역사를 유물변증법적인 논리와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히 갖고 있다는 변혁논리는
선명히 이해하고들 있었습니다.
―신선생이 감옥에 머문 지난 20년은 우리 사회가 한편으로는 물량적인 의미에서 근대화를 향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나가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극복하고 민족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전개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8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민족운동은 참으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고 사상적으로도 혁명적인 양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사회운동·사상운동의 보편적 확산과 질적 심화의 근처에는 면면히 흘러내리는 역사적 맥락이 있지않은가 합니다. 그것은 60년대로 올라갈 뿐 아니라
그 이전으로도 연결되겠지요. 역사발전이란 어느날 갑자기 평지돌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오늘 이 시대의 의식 내지 사상적 수준과 맥락은 해방 직후 그리고 1930년대로 거슬러올라간다고 느껴지기도 해요. 특히 48년 분단이 되면서
우리의 사상운동은 괴멸되다시피 되었지만, 그러나 그 저류에서는 역시 살아움직이고 있었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부문운동으로
현재화되지는 않았지만, 그 기층에는 잠재해 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감옥 안에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무기수가 되어 감옥 안의 한계상황에 던져짐으로써 부딪치게 되는 느낌은
무엇이었습니까?
감옥 바깥에서 우리 사회의 모순이랄까 역사적 전개와 그 현실에 대해 이론적으로 해석해보려고 추구하던 중에 감옥에 들어갔지요. 들어가기 전에도
민중들의 문제는 민중들의 절박한 삶의 현장에서 그 이론과 사상의 틀이 추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내가 교도소에 들어옴으로써
민중의 맨 하층부분인 룸펜프롤레타리아인 범죄자라든가 실패자라든가 하는, 어쩌면 민중들의 가장 처절한 현장에 서게 되는 것이었지요. “아, 내가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만나고자 했던 민중의 실체를 여기서 직접 만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들 하층의
민중들을 범죄 또는 사건과 연관시켜 봅니다. 이들과 긴밀한 공동생활을 통해, 이들도 당초에는 농촌이나 공장에서 몸부림치다가 이러저러한
우연적·필연적 이유로 떨어져 나와 교도소까지 들어오게 되었지만, 이들도 튼튼하게 삶의 현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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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란 이 사회의 모순을 집약
―한 개인의 범죄행위도 사실은 대단히 사회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갖고 있지요. 교도소에서 우리는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되지 않습니까. 밖의 사람들은 죄수들을 모두‘도둑놈’으로 보지만,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외면하지요.
교도소란 사회의 모순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제가 육사에서 중위계급을 달고 교관으로 있다가 군사재판을 받고 육군교도소에 한동안
수감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군 이탈이나 상관 살해 등 격정적인 사건으로 들어온 수인들이 많았는데, 이같이 개인적인 성격 등으로 사고나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보다가 일단 민간교도소로 넘어가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노인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노인은 그들 성격이 사건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사건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이란 사회적인 것입니다. 범죄사건이 그 사람의 인생과 연결되면서
그 범죄사건의 강한 사회성을 우리에게 설명해줍니다. 이런 점에서 교도소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바라다보는 시각은 한마디로 사회의 모순구조를
통해서 바라다보는 시각입니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을 바라다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고, 또 국립박물관에서 바라다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으며,
안기부에서 바라다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지요. 교도소에서 바라다보는 시각은 사회에서 가장 힘든 자리에서 그 사회에 끝내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 사회의 중압이 내리누르는 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범죄를 범인의 개인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나는 개인적인 책임보다는 사회적인
책임이 훨씬 크다고 보아요. 그 속에서 나는 늘 경험했습니다. 만기출소하는 사람과 악수하면서 이 사람은 다시 들어오지 않겠지, 저 사람은
재소생활을 보아 틀림없다고 생각되는데 늘 그 예상이 빗나가곤 했습니다. 많은 경우 다시 들어옵니다. 그 사람의 인간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사회적 조건이 다시 교도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때문에 돌아오는 것이지요.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요.
―밖의 사회적 양상은 교도소 안으로 투영되지요. 우리 사회의 모순과 변화하는 모습이 범죄양상에 어떻게 투영됩니까?
"초기에는 생활고에 의한 범죄가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청소년범죄가 늘어나지요. 또 범죄행위의 조포화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들과 이야기해보면 사회
자체에 대한 반감, 계층간의 깊어지는 골에 대한 노골적인 저항감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계층들을 소외시켜나가고 있는 국가사회의 운용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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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불평등을 보완하는 순환구조
―요컨대 형무소 또는 교도소라는 존재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가진자들의 질서와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형무소라는 것 자체가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보완하고 밑받침하는 순환구조의 역할을 합니다. 이름은 교도소라지만 모순구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않고, 그 모순구조에서 양산되는 개인들을 처벌만 하는 것은 그 모순구조를 계속 유지시킬지는 몰라도 개선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교도소라는 것이 있으므로 해서 범죄가 과연 줄어드는 것인지, 아니면 교도소가 없다고 해서 교도소가 있을 때보다 범죄가 줄어들지 늘어날지는,
사실 모를 일이 아닌가 합니다.
교도소 자체가 사회모순구조의 표현일지는 몰라도 그것의 해결과는 연결되지 않지요. 그렇다면, 범죄자에 대한 처벌의 방식도 그 사회가 갖는
모순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형벌의 내용과 종류가 그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양식을 닮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요인이 과감히 변혁되면 범죄에 대한 처벌의 내용과 방식도 훨씬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교육적 차원에서 그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 다시 말해 죄수의 인간성을 유폐시키고 쇠락시키는
교도정책이 아니라 다시 스스로 일어서게 하고 스스로의 의식을 스스로 키우게 하는 정책을 의미하겠지요.
지금은 하도 많은 사람들이 교도소를 다녀와서 잘 아는 이야기겠지만, 교도소의 감방마다 어딘가에‘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사실
교도소에 갇혀 있는 모든 죄수들의 죄를 다 합산해도 교도소 바깥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몇 사람이 저지르는 범죄보다 적을 거라고 재소자들은
주장하기도 하지요. 한 젊은 친구가 나에게 심각하게 질문했습니다. 자기 누이가 창녀인데, 목에 칼을 대고 하는 짓은 강간이고, 목구멍에 돈을
대고 하는 짓은 강간이 아니냐는 것이었어요.
―구조적 폭력은 사실 합법이란 가면으로 치장되기도 하지요.
1년에 땅값 상승으로 42조 원을 이익보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폭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재소자들은 명쾌한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실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적절한 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적나라한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사회와 삶에 대해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습니다. 한 노인이 아름다운 수필을 읽었는데 그는 수필에 장식되어 있는 아름다운 표현에 현혹되지 않아요. 뭘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땅
좁아서 꽃 못 심는다는 이야기 하고 있더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목수에게서 나는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려 내려가지요. 그런데 그 분은 주춧돌부터 그려 올라가요. 이들은 개념구조란 논리구사에 있어서는 미숙하더라도 사고 자체는 아주
논리적이고 명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논리나 사상은 추상적 관념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발로 설 때
이루어집니다. 이런 삶의 결론이 곧 사상이자 논리라고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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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의 자유만 주어졌다면
―아직도 수감되어 있는 빨치산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구빨치나 신빨치들은 오늘의 학생운동가들이 이론이나 사상으로 출발하는 것과는 달리 자기 생활상의 현실적인 요구 때문에 산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이론에 대해 잘모르지만, 무엇이 자기를 누르고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를 몸으로 확실히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나는 이 사람들을 통해 초토화된 우리 역사의 진면목에 관해 귀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생생한 체험의 역사였습니다.
일반재소자로부터 사회의 모순구조를 살펴보는 사회인식을 키울 수 있었다면, 사상범들을 통해서는 한국현대사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고 이것은
살아 있는 나의 역사의식을 키울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교도소란 본질적으로 인간을 억누르는 국가권력의 합법적 폭력기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우리의 교도정책의 가장 반인간적이고 반인권적·전근대적인 것은
재소자들이 스스로의 생각을 마음대로 적을 수 없다는, 다시 말해 집필할 수 있는 기본권이 박탈되고 있다는 데 있지 않나요. 그곳 사람들도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기본권을 갖고 있을 것인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정치범·사상범들이 집필을 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위대한 작품과
사상이 창출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이 시대 민족사회의 엄청난 문화재가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인간본성의 정상적인 발전이란 자기 표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정다산의 책을 읽으면서, 유배지에서 그렇게 집필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읽고 생각하고 그것을
정리해 기록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징역을 살면서 늘 느꼈습니다. 이는 저뿐 아니라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너무나 당연한, 본능적인 바램이지요.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람시, 우리의 단재 선생이 감옥에서 위대한 저작을 저술해냈지요. 글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게 하고 쓰지도 못하게 하는 우리
사회의 행형제도는 그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이라는 걸 짐작케 합니다. 밖에 나와서 글을 쓰려니까 잘 안돼요. 안에서도 늘 독서를 하긴 했습니다만,
독서라는 것도 독서한 내용을 서로 토로하고 집필하는 과정으로 연결될 때 독서다운 독서가 되겠지요. 학술적·현실적 실천과 연계되는 독서가 진정한
독서입니다. 독서를 위한 독서, 실천과 유리되어 있는 인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감옥생활의 중·후반기로 오면서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대거 감옥으로 가게 되지요. 응원군을 만난다는 기분이었을까요, 덜외롭기도 하고.
그동안 내가 바깥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들어오던 것을 이들을 통해 정리하게 되지요. 거기 있으면서 자기 생각이 녹슬지 않게 늘 노력을 하게
되는데, 운동권 출신의 신입들로부터 지금까지 갖고 있던 생각을 확인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고무받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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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현대사 그 배경으로서의 20년
―당초 형량을 얼마나 선고받았나요?
나는 군법회의 1·2심에서 사형선고 받고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어 고법에서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무기징역으로 죽 있다가 가석방되어 나온
것입니다.
―왜 가석방시켜주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고, 오래 있으니까 내준 것이지요. 대개 일반수인 경우 초범이면 14, 5년 있으면 내주고 사상범인 경우는 20년이 되면
내주지요. 그러나 전향이란 형식을 밟아야 합니다.
―무기징역 받더라도 희망이 있던가요?
모든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버리지는 않아요. 바깥에 나가면 뭘하고 어떻게 될 거라는 환상까지 포함한 희망을 여전히 갖고 살지요. 나의
경우 오랜 세월 여기 살아야 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나간다는 희망 그것보다 여기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배운다는 사실이 훨씬 더 자신을
지탱하는 데 큰 희망이 되어주었습니다. 공장에서 전혀 새로운 사람들과 같이 작업을 한다든가 뜨거운 인간관계를 만든다든가, 스스로의 관념적인
껍질을 하나하나 벗어나는 체험을 하면서 그날그날 살아간다는 것은 아득한 희망에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생동감 있게 스스로를 견뎌내게 했습니다.
―신선생의「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서 저는 삶의 소중함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절망감이랄까 강한 슬픔 같은 걸 느꼈습니다만.
저는 그것들이 책으로 엮어지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고, 또 그것을 위해 쓰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내가 어떤 생각들로
부대꼈던가를 어떤 형태로든 기록해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유일한 집필형식인 편지를 통해 나의 생각을 적어보았던 것입니다. 그 짧은 편지들을
읽어보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몇줄 안되는 그 편지 속에서 나는 같이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20년의 감옥살이는 한 인간의 생애이기도 하지만, 신선생의 그 20년이란 세월은 1945년 이후 한국현대사의 결정적인 시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20년이란 이 나라 이 사회의 민족·민주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입니다. 이 중요한 시기의 감옥체험은 신선생의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이 민족사회가 겪는 상징적인 체험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선진적인 지식인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라고도 하겠지요.
역사라는 엄청나게 장대한 드라마에서 사람들은 각각 고유한 역할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라면, 20년 감옥살이라는 역할을 해낸 신선생은 우리 현대사의
역사적 배경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나는 참으로 중요한 역사적 격동기에 본의 아니게 감옥으로 밀려나서, 크게 보아 역사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것이 현실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장은 아니고 어떻게 보면 이 시대의 한복판이라고도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 운동 속에서 실천적으로 연대하지 못했지요. 그러나 이 격동기에 감옥으로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과 오히려 더
긴밀하게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저에게 대단히 소중한 생의 자산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맞고, 또 내보내고, 마치 교도소의 주인처럼 있다가
나왔다고나 할까요. 새로 들어온 젊은이들이 겪게 되는 고통을 어떻게 해서 좀 덜어주게 되면 즐겁고, 그렇지 못하면 안타깝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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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는 나에게‘불완전한 8·15’
―드디어 출소하게 되었는데, 어떤 감회라도 몰려오던가요?
저는 밖에서 양심수석방운동 등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계속 들어왔고, 또 20년이나 살았으니까 조만간 나가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그렇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가서 내가 어떻게 설 것인가 하는 문제가 걱정되었습니다. 막상 나오려하니, 나보다 징역을
많이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지만 이제 징역을 살기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미안했습니다. 감옥으로부터 먼저 나오는 사람은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빚을 지는 느낌이지요. 이걸 초월할 수 있는 몇몇 사람들과 이야기는 했지만, 다른 친구들과는 악수도 못하고 조용히
걸어나왔습니다.
―오랜 세월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달관의 경지에 서 있는지도 모르지요.
오랜 세월 같이 지낸 사람들은 자기의 한 부분이 출소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가슴 한쪽엔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이야
없겠습니까만, 그래도 냉정하게 축하해주었 습니다.
―감옥 밖으로의 첫발을 디디면서 어떤 감회가 오던가요.
우리 역사에서 시대구분을 하듯이 저 개인에게는 1988년 8월 15일의 출소는 인생의 시대구분 을 하는 계기가 되겠지요.
―우리 역사와 견주어보자면 어떤 시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 개인의 8·15라고 할까요. 우리 민족사회에 8·15가 불완전한 것처럼 저 개인에게도 불완전한 8·15라는 건 확실하지요.
―출소 이후 한 학기를 쉬다가 89년 봄학기부터 성공회신학대학에서 다시 학생들과 만나게 되는 데, 20년 전의 강단과 오늘 다시 서는 강단은
세월 이상의 어떤 차이가 있던가요?
옛날에는 책에 의존해서 책의 내용을 단순히 전달하는 데 그쳤지만, 특히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신학을 전공하기 때문에, 저는 학생들과
인간의 문제, 민족과 사회의 문제를 더불어 생각하는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창백한 철학이나 무색한 사회과학적 논리가 아니라 이것들이 우리 역사와
현실과 인간문제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는가를 논의하지요. 제가 여기서 강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청강하러 오는 학생들이 많은데, 이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오늘의 젊은이들이 민족과 사회문제뿐만 아니라 인간문제에 진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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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자기변혁이란 더불어 가능한 것
―20년 만의 단절 끝에 다시 만나게 되는 친구들로부터는 뭘 느끼게 되었나요?
나는 관념적이든 창백했든간에 지식인의 사고를 갖고 있다가 전혀 인연이 없던 재소자들의 사회, 우리 사회 밑바닥의 소외된 동네에서 20년이란
세월을 살았던 것인데, 이 기간 동안 제가 의도적으로 시도했던 것은 자기개조 자기변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이들과 더불어 어울리면서 나의
관념성을 척결하고 뜨거운 현실성과 구체성을 획득해보겠다는 노력을 의식적 으로 했는데, 20년을 그 속에서 있다가 나와서 만나본 옛날 친구들은 그
외형은 많이 변했지만 그 사고의 유형이라 할까 의식구조는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았어요. 사람이 참 달라지기 어렵다, 자기 자신을 변혁시키고
개조해나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걸 느꼈습니다. 나의 경우를 투사해보아도 마찬가집니다. 징역들어가기 전과 징역살다 나온 이후 나는 과연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결국 개인을 단위로 하거나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인간의 변혁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를 어느
동네, 누구의 이웃에, 어떤 문제 속에 자기를 세우는가에 따라 그 변혁은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고 완성된다는 겁니다. 한 개인의
변혁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한다면 역사나 사상이나 철학이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그러나 변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변하는 것이 인간이겠지요.
요컨대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사회적 현실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은 자기변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변혁 또는 개조도 그 사회적 수준의 변혁 또는 개조만큼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저는 학교에 서 있지만, 역시 나에게 계속 주어지는 과제는
나를 어디에 세우고 어떤 과제 속에서 나의 일을 발견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내가 추구해온
자기변혁·자기개조 작업의 연장선상에 나를 세우는 일이 과제로 주어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민족운동·사회운동에 대해서 느끼는 바가 있다면,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현재 여러 분야에서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통일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모두들 대중노선에 대해 합의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과연 그렇게 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지도 않은 듯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생각이 달려져야 하는 것이지요. 일하는 방법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운동이란 방법과 과정 그 자체가 목적과 연결되어 있는 변증법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단은 목적의 낮은 단계지만, 목적은 수단의 연장된 단계지요. 목적과 수단의 통합은
우리가 늘 당위를 강조하면서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운동의 대중성을 담보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류 | 제목 | 게재일 | 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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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인터뷰 | 길이 만난 사람 - 월간 '길' 1993년 5월호 | 1993-05-01 | 월간 '길'_윤철호 편집국장 |
대담/인터뷰 | 모든 변혁운동의 뿌리는 그 사회의 모순구조 속에 있다 - 손잡고더불어.2017.돌베개.수록 | 1993-01-15 | 계간지 '이론' 3호_정운영 대담 |
대담/인터뷰 |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 만에 가석방된 신영복씨 | 1989-11-01 | 사회와 사상(한길사) 통권 제1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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