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1990-0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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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한겨레신문 |
[한겨레논단]
개인의 팔자 민족의 팔자
그의 사건은 한겨울 한밤중 비무장지대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남과 북의 총칼이 서슬 시퍼렇게 날선 DMZ. 얼어붙은 어둠을 찢는 한 발의 총성이 그의 21년을 앗아갔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선 분대 규모의 야간작전중에 누군가의 M1 소총이 오발되면서 그의 하복부를 좌우로 관통했다. 그는 피를 뿌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쏟아진 창자를 도로 집어넣고 탄띠로 동인 다음 정신을 잃었다. 얼마 뒤 다시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적막한 산천, 칠흑 같은 어둠 그리고 심한 갈증만 엄습해왔다. 희미한 물소리를 향해 피묻은 손톱으로 언 땅을 긁으며 기어가다 다시 의식을 잃었다. 이것이 기억의 전부다.
그는 이튿날 새벽 군사분계선에서 북쪽으로 약간 벗어난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들것에 실려 다니며 단 한마디의 대꾸도, 단 한사람의 증인도 없는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는 소대장과 '내응하여 월북을 기도하다' 피격 당해 체포된 것으로 되어있다.
좌익장기수라는 '곱징역'을 고스란히 치르고 89년 3월, 21년만에 마흔다섯살의 대머리 총각으로 만기 출소했다. 군대생활을 집어치우고 집에 와서 농사나 지으라고 성화시던 아버지도 돌아가신지 이미 오래고 고향은 다른 많은 농촌과 마찬가지로 그가 돌아갈 곳이 못되었다. 출소 사흘째부터 부산 부두 컨테이너 하역작업에 나가 이제는 징역 대신 1백20㎏의 짐을 지다가 며칠전 새벽 2시 눈비 맞으며 서울로 왔다.
징역사는 동안 그에게는 한가닥 기대가 있었다. 월북한 소대장이 간첩으로 남파되어 체포되면 사실이 밝혀지리라는 기약 없는 기대였다. 그러나 21년 동안 그를 지탱해준 것은 이런 기대보다는 오히려 그처럼 무고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수많은 장기수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위로였다.
거대 여당의 출범과 함께 '거대한' 3·1절 특사가 있으리라는 보도가 있지만 그것을 믿는 쪽은 도리어 바깥사람들일 뿐 막상 당사자들은 지금까지의 예로 보아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만델라의 27년에 대해서는 경악하면서도 우리의 38년 장기수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광복절·불탄절·성탄절 등에 죄인들을 너무 많이 풀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만기출소자가 하루 평균 3명이라면 30개 교도소에서 매일 90명이 출소한다. 만약 그들을 한달 앞당겨 석방한다면 무슨 이름 있는 날 한꺼번에 2천7백명을 석방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상상해주기 바란다.
"다른 사람들은 모범수가 되어 모두 석방되는데 당신은 아직도 그 모양이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떠나버린 어느 아내의 딱한 이야기도 있다.
"그 소대장 간첩으로 잡혔다는 소식 아직 없어?" "다 팔자소관이지요. 오발탄도 그렇지요. 하필이면 북쪽으로 기어간 것도 그렇지요. 이제 통일될 때나 기다려야지요"
그에게 있어서 통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21년 징역의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우리시대의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비록 수많은 장기수들처럼 분단과 직결되어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분단시대를 살아 온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과 분단을 연결해 보는 시각은 곧 통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하는 지극히 사회·역사적인 관점이다. 통일에 대한 무수한 주장은 각자의 이런 입장에 근거해 있으며 또 근거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의 팔자는 민족의 팔자에 종속된다는 사실이다.
남아공과 만델라의 팔자, 루마니아와 모리츠의 팔자, 문익환과 임수경의 팔자, 그룹총수의 팔자에서부터 이름 없는 노동자와 창녀촌의 영자에 이르기까지 얼핏 민족의 팔자와 무관하게 보이는 개인의 실패나 성공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에 가위눌려 팔자를 망치든가, 그것을 딛고 올라서서 팔자를 고치고 있다.
그는 그저께부터 아파트 건설공사장의 배관공으로 일 나가기 시작했다. 임대주택이 될지 호화주택이 될지도 모르는 채 동파이프와 씨름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보안관찰법으로 그를 관찰할 것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그의 얼굴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군대에서 사고가 났다는 점 말고는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없다.
그는 지난 주 우리집 이삿짐을 나르다 머리에 상처가 났다. "그러고 보니 고르바초프 닮았네." 하필이면 최고권력자들의 이름이 최고 허약자의 별명이라니.
그 별명은 희극이되 그 팔자는 아무래도 비극일 수밖에 없다.
한겨레신문 1990. 2.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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