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1990-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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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한겨레신문 |
[한겨레논단]
따뜻한 토큰과 보이지 않는 손
새벽 영등포 버스 정류장 가판대에서 토큰 한 개를 샀다. 따뜻한 토큰이었다. 토큰에 배어 있는 할아버지의 체온이 나의 손으로 옮아왔다.
새벽 사창가 유리진열장 속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인적도 없는 골목, 어둠을 물들이는 홍등 밑에 거의 벗은 몸으로 앉아있었다.
무엇이 이 사람들을 새벽거리에 나앉게 하는가.
남대문 새벽시장과 사당동 날품시장의 이 시간은 이미 파장이고 청량리·서울역은 벌써 숱한 사람들을 싣고 몇 차례나 열차가 떠나간 후이다.
무엇이 이 숱한 사람들을 새벽 어둠 속에 나서게 하는가.
선량하나 무력한 사람은 그 딱함을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생각하나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이들을 통하여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을 확인하기도 하며, 분석하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이를 미루어 동유럽의 붕괴를 예견하기도 하고, 생산하나 나누지 않는 사람은 이들의 근면을 들어 시장과 자유의 위대함을 예찬하기도 한다.
사회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거나 현상을 현재만으로 설명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불꺼진 골목을 걷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묻지 않으면 안된다.
"흉기를 들이대고 하는 짓을 강간이라 하면서 돈을 목구멍에 들이대고 하는 짓은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가." 누이를 망쳐버린 어느 오라비의 한 맺힌 질문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상대방의 뜻에 반하여 자기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강제를 폭력이라 한다면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폭력을 조직폭력, 떼강도, 인신매매 등 이른바 '치안' 차원의 범법에만 국한시킬 수 있는가.
개인과 개인, 계층과 계층, 민족과 민족이 합의된 목표를 공유하지 않는 한 그것은 억압과 저항의 관계이며, 본질에서 폭력적인 관계이다. 민주주의는 동일한 목표를 승인한 집단 내부의 것이며, 기본적으로 방법상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개혁과 안정을 고민하던 경제팀이 물러나고 거대여당을 등에 업고 성장의 대의를 앞세운 경제팀과 강력한 공안팀이 나란히 등장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갖는 우려는 무엇 때문인가.
재물이 모이면 민심이 흩어지고 부자 하나 나면 삼동네가 망한다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우리는 지금껏 몸살해 오고 있다.
돌이 돌을 치면 불꽃이 튀고 계란이 돌을 치면 박살이 나고 돌이 풀을 누르면 풀이 눕는다. 그것이 불꽃이든 아우성이든 침묵이든 상관없이 관계 그 자체의 본질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불꽃에 관한 이야기든, 아우성과 침묵에 관한 이야기든 그것이 다만 돌멩이를 가리킬 때에만 진실이 된다.
토큰은 버스를 만나고, 버스는 길을 메운 승용차를 만나고, 승용차는 자동차공장을 만나고, 공장은 수출과 미국과 개방과 황량한 농촌을 만난다. 이 농촌에서 가판대의 할아버지는 두고온 고향을 만난다.
홍등을 끄면 주점의 네온이 붉고, 네온을 끄면 산동네 전등불이 빌딩처럼 높고, 산동네 높은 전 등을 끄면 멀리 공장의 불빛이 보인다. 그리고 이 공장의 야근 불빛 아래에서 진열장 속의 여자는 두고온 동료를 만난다.
개인이나 사회현상은 그것이 맺고 있는 사회적 연관 속에서만 참모습이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토큰에 배어 있는 따스한 체온에 감동하는 사람의 인정은 고마운 것이다. 그러나 토큰마다 빠져나가는 그의 체온을 서러워하는 그 '할멈'의 자리가 진실에 더욱 밀착된 입장이며, 새벽 흥등 속에 앉아 있는 여자의 치열한 생존을 이해하는 사람의 가슴은 넉넉하다. 그러나 그 누이를 어찌할 수 없는 오라비의 참혹한 입장이 그것의 진실에 더욱 밀착된 자리이다.
대상을 그 사회적인 연관 속에서 파악하는 관점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파악하는 사람,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이다. 눈을 발 딛고 있는 자리에 의해서 그 시각이 결정된다. 승용차를 타면 버스의 횡포에 속상하고 버스를 타면 도로공간을 사유화한 승용차에 속상한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솥에서 밥을 얻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같은 골목을 걸어가고 한솥밥을 나누는 사람들끼리의 합의된 결단만이 진실을 담보해 낸다.
그러한 공감, 그러한 결단의 토대에서만 거대한 바위와 보이지 않는 손의 비밀을 드러낼 수 있으며, 힘있는 양심, 고민하는 지성, 실천하는 이론, 그리고 나누기 위한 생산을 이끌어내는 민주주의가 시작되며 사실로부터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다.
한겨레신문 1990. 3.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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