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이 그들의 '언어'였다

by 이명옥 posted Jan 2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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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년 밖에 살 날이 남지 않은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30년을 함께 살아 온 소가 일 년 밖에 살 수 없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눈빛이 그들의 '언어'였다
[리뷰] 다큐 영화 <워낭소리>

    이명옥 (mmsarah)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나한테는 이 소가 사람보다 나아요."

그랬다. 사람나이로 치면 마흔 살이나 되도록 소와 세월을 함께 한 할아버지로서는.


화면에서 사람의 말은 지극히 절제되어 있다. 소와 사람은 그저 눈빛으로 서로의 욕구를 알아차리고 슬며시 눈길을 거두기 일쑤다. 아픈 소와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할아버지는 자신도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민들레를 뿌리째 캐서 말없이 소 앞에 툭 던져 준다. 밤이나 낮이나 소꼴을 베고 소를 챙기는 할아버지가 야속해 끊임없이 불평을 해대는 할머니의 투정마저 하나도 밉지 않다.


화면 속 가득 농촌의 사계절의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지지만, <워낭소리>의 주인공인 소와 할아버지만큼이나 우리네 농촌의 현실은 쇠락해 있다. 농촌의 평균 연령대가 63세라고 하니 황혼 무렵에 서 있는 것이다.


바로 옆 논은 이앙기로 모내기를 하고 농약을 뿌리고 기계로 타작을 하지만 할아버지는 고집스럽게 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풀을 뽑고,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타작을 한다. 할아버지의 논에는 우렁이가 살고, 메뚜기가 살고 청개구리가 앉아 쉬기도 한다. 그런 할아버지의 일손을 덜어주는 최고의 일꾼이며 친구고 동반자는, 늙어 걸음이 한없이 둔해진 서른 살이나 된 소다. 30년을 함께 한 그 소는 날이 새면 들판에 나가 사는 할아버지가 나들이를 할 때는 자가용이고, 논을 갈 때는 농기구고, 들일을 할 때는 그저 바라만 봐도 위안이 되는 일꾼이고 친구다.


어느새 늙어 걸음마저 둔해진 소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에 생의 대부분을 소와 함께 살아 온 할아버지의 세월이 그대로 녹아있다. 꼴머슴살이로 시작해 우시장 중개인으로, 소 한 마리로 농사를 지으며 아홉 남매를 공부시키느라 소처럼 우직하게 일만 해야 했던 한 농부의 삶 전체가.

소와 할아버지는 변화한 세상의 변화와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묵묵히 주인을 따르는 소, 말수 적은 과묵함을 지닌 할아버지라는 점에 있어서도 주인과 소는 서로 닮아 있다. 그런 그들이기에 서로 바라보는 눈빛으로 생의 내리막길에 서 있는 서로를 향한 연민과 끈끈한 정을 감지한다.

마지막 충성을 다하듯 땔나무 가득한 소달구지를 힘겹게 끌던 소와 그 옆에서 지게에 나무 한 짐을 지고 나란히 걷던 할아버지. 새끼 밴 암소를 들여 온 뒤, 외양간 밖으로 끌려 나온 소가 장맛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서 있다가 할아버지를 묵묵히 바라보던 장면, 석양이 깔린 길 위에 소달구지를 타고 졸며 나란히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워낭을 손에 들고 커다란 나무 아래 힘없이 앉아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 등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영상으로 가슴에 새겨질 것 같다.


출처 : 눈빛이 그들의 '언어'였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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