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아름다움

by 하루살이 posted Jan 2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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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화(墨畵)

        -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이 시의 앞 두 줄을 이렇게 바꾸어 읽어본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가 손을 얹었다.

피동접미사 '히'를 빼고 나면 시의 호흡이 별안간 빨라진다. 할머니의 손길이 소 목덜미까지 가닿는 시간도 빨라진다. 그렇게 되면 소를 쓰다듬는 할머니 손길이 경건함도 지긋한 사랑의 느낌도 사라지고 만다. 시를 망치는 순간이다.

능동적인 생각과 행동만이 우대 받는 세상을 우리는 통과해 왔다. 느림이나 게으름 따위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악성 종양으로 알고 지냈다. 학교의 선생도 집안의 부모도 우리에게 좀더 빨리, 좀더 높은 곳으로 가야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야만 행복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 소 목덜미에 손을 얹는 할머니는 얼마나 낮은 곳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할머니가 얼마나 천천히 부엌에서 걸어나왔는지, 얼마나 느리게 소한테 여물을 갖다 주었는지, 소가 여물을 우물거리는 동안 얼마나 찬찬히 소를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다 안다. 그리고 소와 함께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저녁무렵, 할머니에게 이미 소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 아니다. 서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들여다볼 줄 알고, 서로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동병상련의 심정이 여섯 줄의 짧은 시에 가득차 있다. 게다가 행간과 행간 사이의 무한한 여백, 눈짓으로 대신하는 말 없음, 쉼표의 적절한 역할도 오히려 시를 그윽하게 만드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김종삼의 시가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세상만물의 관계를 여백으로 이어주고, 여백으로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 안도현. 『 사랑은 다 그렇다 』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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