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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석 소설가 - 여섯의 죽음, 사과도 않는건 멸시다
  

나는 요즘 서울 고덕동의 작은 시영 아파트 하나를 빌려 작업실로 쓴다. 아파트라고 하지만 실은 20여년 전 도심의 판자촌을 철거할 때 그곳의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기 위해 마구잡이로 지어진 아파트일 뿐이다. 방이 둘, 거실이 하나, 몸뚱이를 틀기가 거북할 지경으로 비좁은 화장실 겸 욕실이 하나, 이런 식으로 15평의 공간이 어색하고 기묘하게 나뉘고 또 나뉘었다.

20여년 전에는 휑뎅그렁한 도시 외곽의 야산이었던 이곳에도 이제는 여기저기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동네에도 재건축 바람이 불어 15평 아파트 한 칸이 4억원이 넘어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곳에 처음 둥지를 틀었던 주민들 상당수는 이미 자리를 떠난 것 같다. 집주인은 주로 외지인들, 그러니까 투자 목적으로 아파트를 사둔 이들이고, 주민들은 대개 세들어 산다. 15평짜리 아파트에 다섯 식구도 살고 여섯 식구도 산다.

그래도 아이들은 노스페이스를 입고 다니고, 나이키를 신고 다닌다. 저녁이면 학원 버스들이 아파트 단지 내 도로를 누비며 아이들을 실어 나른다. 졸라대는 아이들을 당해낼 수 없었을 부모들의 심사도 보이고, 아이들이 좀더 좋은 학교에 들어가 좀더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욕심도 보인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날에 나는 여기 사는 이웃들의 하루가 얼마나 일찍 시작되는지 알 수 있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먼저 일어나 출근에 나섰다. 도대체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란 어떤 곳일까? 나중에야 나는 그들이 대개의 경우 청소를 한다는 것을, 또는 식당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이트칼라들이 출근하기 전에 청소를 끝내기 위해서는, 일찍 출근하는 손님들의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서는 그들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이들보다 부지런한 이들을 알지 못한다. 가난한 자는 게으르고 게으르니까 가난하다는 생각은 부르주아들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곳의 이웃들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토록 부지런한데도 이들의 입성은, 이들의 식료는 때로는 간소하거나 초라하고, 때로는 참혹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스페이스나 나이키는 아이들의 욕망,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은 부모들의 욕망의 표현일 따름이다.

그 욕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다름아닌 장사꾼들, 가난한 이들의 마늘 하나마저 빼앗아 거만의 부를 축적하고 그로도 부족하여 금융 장난까지 저질러 지금 온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더욱 깊은 가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바로 그자들이다. 코 치켜들고 턱 치켜들고 수백만원짜리 양복에, 수억원짜리 차에 몸을 싣고 다니는 자들, 바로 나의 가난한 이웃들을 멸시하는 자들이다. 어찌하여 그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멸시할 수 있는 것인가? 매일 저 가난한 이들의 마늘을 빼앗아 제 차에 기름을 넣는 주제에 어찌하여? 저 가난한 이들의 옷을 빼앗아 제 옷의 세탁비를 지불하고, 저 가난한 이웃들의 밥을 빼앗아 제 금준미주(金樽美酒)에 냄새를 더하는 주제에 어찌하여? 도대체 누가 그런 권리를 주었는가? 하물며 도대체 누가 이들을 죽일 권리를 주었는가?

며칠 전 용산 재개발지구에서 경찰들의 특공대 진압 과정에 죽어간 이들은 나의 이웃들이다. 최소한 자본가의, 경찰의, 서울시의, 정부의 과실치사가 분명한 이 사건에 대해 책임있는 당국자가 아직까지도 온전히 사과조차 않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나라의 모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멸시의 표현이다. 나는 이번 사건 자체보다도 이 멸시가 더 무섭다. 이 멸시는 필요하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비슷한 일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당국자와 자본가들의 선언이다.

우리 이웃들이 죽은 구체적이고 과학적 이유가 무엇이건, 형사법적 책임소재가 어디에 있건, 다섯 명의 사람이, 아니, 경찰까지 포함하면 여섯이 죽었다. 그 죽음 앞에 이 사회는, 이 나라는, 우리는 어찌 이리도 뻔뻔한가? 가장 두렵고 소름끼치는 것은 바로 이 뻔뻔함이다. 욕망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더 뻔뻔해질 각오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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