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항산(有恒産) 무항심(無恒心)- 신동아 권두수필 199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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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1996-11-01
미디어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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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내일 출소합니다. 머지 않아 국가의 은전이 있어서 사회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요."
이 짤막한 대화는 형기를 끝마치고 출소하는 재소자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인사말입니다. 10년 20년동안 징역살이를 하는 장기수들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러한 인사로 떠나 보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이제 다시 들어 오지 않겠지.
저 친구는 아마 한 두번은 더 들어오겠지.

별로 오래지 않아서 그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서울에서 죽었다더라. 부산에서, 광주에서 죽었다더라. 물론 '죽었다'는 말은 구속되었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그가 출소한 교도소에 다시 수감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멀리 뛰어봐야 벼룩이지'하는 연민과 경멸이 뒤섞인 수사를 곁들여가며 우리의 곁을 떠나갔던 그를 다시 화제에 올리게 됩니다. 다시 구속되어 접견대기실에 앉아있는 그를 봤다느니, 미결사동에서 그를 봤다느니 그의 이야기는 점점 우리들 가까이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은 머지않아 그가 형이 확정되어 기결사동으로 넘어오게 됨으로써 사실로 확인됩니다. 출소와 함께 멀리 원심 운동을한 그의 발길이 거대한 구심력에 이끌려 돌아옵니다. 교도소의 구심력에 이끌려 돌아오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원심력에 떠밀려 교도소로 밀려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소위 'U턴'을 하여 교도소로 돌아옵니다.

때로는 지난번 징역때 출역했던 공장에 다시 출역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지난번 징역때 살았던 바로 그 방으로 다시 배방되어 들어오는 경우마저 드물지 않습니다. 면목없어하는 그를 핀잔도 하고 위로도 하면서 우리는 다시 함께 섞여 살아 갑니다. 지난번 징역인지 이번 징역인지 구별되지도 않은 채 살아 갑니다.

그리고 어느덧 만기가 되면 다시 만기인사를 합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내일 출소합니다. 머지않아 국가의 은전이 있어서 사회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요."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인사를 또 나눕니다. 장기수들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맞이하고 떠나보냅니다. 마치 감옥의 주인입니다.

내가 대전교도소에 살았던 15년동안 같은 사람과 여러번씩 만기인사를 나누었음은 물론입니다. 한 사람과 7번의 만기 인사를 나눈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5년 동안에 7번을 들어온 셈입니다. 지금은 징역이 비싸져서 1, 2년형이 드물지만 그 때만 해도 2년형이면 징역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6개월형, 10개월형도 많았고 웬만한 경우는 1년이나 1년 6개월정도였습니다. 같은 사람과 7번의 만기 인사를 나누기는 앞으로는 매우 어려우리라고 생각됩니다.

징역 초년시절 나는 만기자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속으로 짐작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다시 들어 올사람인가,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사람인가를 속으로 매겨두는 것입니다. 개중에는 한 두번 더 들어오겠지 싶은 사람도 없지 않았고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던 사람도 많았습니다. 징역살이는 그 사람을 가장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나 마음 씀씀이에서부터 그가 지닌 기능이나 습관, 그의 과거사와 집안 내력, 친척과 친구들의 면면에 이르기까지 바깥 사회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까지 자연히 알게됩니다. 그 사람의 잠꼬대까지 알고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나의 짐작에 대하여 상당한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들어오지 않으리라고 매겨 두었던 사람이 또 들어 올 때 내가 느끼는 실망과 회의는 매우 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만나 어색한 악수를 나눌 때의 나의 심정은 착찹합니다. 그래서 해를 더해 갈수록 나는 출소하는 사람에 대한 점수를 짜게 매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훨씬 엄격하게 하여 틀림없다 싶은 사람에 대해서도 다시 들어 올때까지의 기간을 다소 길게 잡아 줄뿐 여간해서는 다시 들어오지 않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7번의 만기인사를 나눈사람이 있듯이 대부분의 기대가 빗나가기 마련이었습니다.

사람이 소위 범행을 하게 되는 까닭이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에 있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는 그 사람의 처지(處地)에 있다는 것을 알기 까지는 내게는 참으로 많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나자신이 세상의 거대한 원심력에 떠밀려 옥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확인하기까지는 참으로 수많은 사람의 삶을 읽어야 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사회의 보다 깊은 실상을 읽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나는 징역초년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육군교도소는 군수형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재소자들은 20대의 젊은이들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때는 나도 20대였습니다. 폭행, 상해, 살인사건도 더러 있기는 하였지만 재소자의 거의 대부분이 경미한 범죄라 할 수 있는 군무이탈, 휴가미귀, 초소근무이탈 등이었습니다. 애인이 변심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음 때문이기도 했고 병영의 질서나 비합리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사건'은 당사자 개인의 '성격'과 연관되어서 이해되었습니다. 성격상의 결함이나 자제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저질러진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건과 개인의 성격을 직선적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사고(思考)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형이 확정되어 민간교도소로 이송되어 왔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교도소에 노인 재소자가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육군교도소에서는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던 노인재소자들이 민간교도소에는 그리도 많았습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노인이 교도소에 많이 있다는 사실은 사건과 당사자의 성격을 직선적으로 연결지어 생각하던 나의 사고(思考)에 심한 혼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인의 경우는 그 사건과 그 사람의 성격상의 결함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혼란은 차츰 한가지의 분명한 의문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습니다. 저 노인은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저 나이에도 징역살이를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한마디로 노인의 징역은 그 노인의 성격상의 결함과 관련지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인생과 관계되어 설명되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내가 징역 햇수를 거듭해감에 따라 차차 알게 된 것이지만 일생의 절반 이상을 장역살이로 채워 온 노인들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것이었습니다.

만주로, 일본으로, 농사일로, 도시의 품팔이로 그 긴 세월을 떠도는 동안 한 번도 따뜻한 정처(定處)를 얻지 못하고 줄곧 떠밀리고 쫓기며 살아온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작고 짧은 성공의 시절이 있기도 하였지만 길고 어두운 좌절의 세월을 걸어야 하였습니다. 노인들의 징역살이에서는 그 개인의 성격상의 결함을 읽기 이전에 그의 인생을 읽게 되고 그의 인생에서는 그 세월에 점철된 근대사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얼룩을 대면하게 됩니 다.

세상에는 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야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저 혼자의 힘만으로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없듯이 저 혼자의 잘못으로 떨어지는 꽃잎도 없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부터인가 만기인사를 나누면서 '이제 출소하면 마음잡고 다시는 이곳에 들어오지 말아라'는 상투적인 인사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잡으라"는 말 대신에 "자리를 잡으라"는 말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자리가 먼저인지 마음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너나없이 마음붙일 자리가 없는 사람들이고 보면 아무래도 우선 자리 하나가 무엇보다 절실하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한포기 꽃나무나 마찬가지입니다. 설 땅이 그리운 법입니 다. 무항산자 무항심(無恒産者 無恒心). 항산(恒産)이 없이 항심(恒心)이 있 을 수 없다는 옛말이 바로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범행은 20년전의 그것에 비하여 그 성격이 많이 달라졌음이 사실입니다. 사회의 변화만큼이나 많이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최소한의 생활수단을 얻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다른 동기와 목적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란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우선 범죄와 불법행위라는 전혀 다른 두개의 범주로 확연히 구분하는 일반인들의 범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도, 강도 등의 범죄행위와 선거사범, 경제사범등 불법행위로 나누어지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도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범죄행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가혹한 것임에 반하여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더없이 관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그 인간 전체를 범죄시하여 범죄인으로 단죄하는데 반하여 불법행위에 대하여는 그 사람과 그 행위를 분리하여 그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불법성을 문제시하는 정도입니다. 범죄에 대한 이러한 이중의 잣대는 우리 사회의 불법 행위가 쉽게 근절되기 어렵게 하는 환경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불법행위를 양산해내는 구조와 그 구조적 불법 행위를 범죄시하지 않는 사회적 통념이 서로 결합되어 악순환을 이루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선거부정이나 경제사범의 경우가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욱 크게 달라진 것은 범죄행위든 불법행위든 그 행위의 동기가 한마디로 최소한의 인간적인 항산(恒産)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항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심(恒心)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항심(無恒心)의 원인이 무 항산(無恒産)에 있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만큼의 소유가 항산(恒産)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항산이 왜 항심을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입니 다. 항산이 항심을 지탱해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항산을 마련하는 일보다 항심을 지켜주는 문화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역순(逆順)을 밟아야 하는 것인 지도 모릅니다.

항산과 항심에 대한 생각을 달리다 보면 결국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더 많은 소비, 더 많은 소유를 갈구하게 하는 욕망의 생산구조에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이러한 욕망의 생산구조야 말로 어쩌면 속도(速度)와 경쟁(競爭)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목표(目標)와 수단(手段)의 전도(顚倒)에 대한 불감증이라는 집단적 증후군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과(成果)의 대소(大小)만이 인정되고, 속도(速度)의 지속(遲速)만이 주목 되고, 효율성(效率性)의 고저(高低)만이 평가되는 신앙적 열기속에서 선(善)과 불선(不善)을 논의하고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항산이 항심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목표와 달성은 수단과 과정을 사후적으로 합리화 해주지 못하는 법입니다.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가 올바르고 그에 이르는 과정이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하는 것입니다. 목표는 높은 단계의 수단이고 반대로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표일뿐입니다. 목표와 수단을 통합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이 둘을 각각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고의 파행성이야 말로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 만연해 있는 부조리의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의 사회적 목표가 되어 있는 경쟁력과 효율성의 논의에서부터 경제성장론, 교육철학, 인간학(人間學)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관념은 완고한 율법적 권위로 우리의 머리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목표보다는 그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하고 그 과정을 올바르고 선량한 것으로 만들어 내려는 항심이 그 어느때보다 치열하게 고민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수단과 과정에도 개의치 않고 오로지 항산과 달성만이 우상처럼 경배되는 거대하고 집단적인 증후군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나는 7번의 만기 인사를 나누던 가난한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게 됩니다. 다시 교도소에 들어와서 면목없어하던 그의 가난한 얼굴과 그 얼굴에 고이던 양심의 가책이 문득 문득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작은 추억으로부터 역설적이게도 오늘의 거대한 부조리의 구조를 읽게 됩니다.

가을바람 소리를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은 겨울을 걱정하는 외로운 나그네라는 싯구가 생각납니다. 지금은 어느곳에서 누구와 쓸쓸한 만기인사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문득 그이와 따뜻한 악수를 다시 한번 나누고 싶어집니다.

신동아 권두수필 199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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