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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10.04.04 15:05

미워도 그리운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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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고향은 과연 어떤 존재일가?

40대중반에 들어선후 가끔 새삼스럽게 뇌리를 치는 질문이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있어서 고향은 누구처럼 아름다운 동년과 파아란 꿈과 행복한 추억만 살아 있는 곳이 아니다.

그 시절 나의 유일한 꿈은 하루 빨리 고향을 벗어나는것이였다.

고향을 벗어나야 농민이라는 멍에를 벗어치울수 있고 농민이라는 멍에를 벗어치워야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살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만치 그때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삶 자체가 나의 굴욕이였고 절망이였다.

아버지는 원래 화룡현 룡수진토산공사의 황연기술원이셨다한다. 룡수진일대의 황연은 거의다 아버지의 손을 거쳐 등급이 매겨졌고 가격이 정해졌다한다.

1961년 아버지는 “력사반혁명”이라는 모자를 쓰고 “하방”을 하게 되였다.

“살 곳이라 해서 짐을 부리우고보니 집이란건 동쪽으로 기울어져 어느날 무너질지 기약을 못하겠고 문이란 문은 모두 귀가 맞지 않아 황소 같은 바람이 불어들고… 그때 그 막막한던 생각을 하면…”

어머니는 늘 이사오던 날의 막막하던 심정을 옛말삼아 나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1965년 음력 7월, 나는 황소 같은 바람이 불어들던 그 집 구새목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다행스럽게도 옥수수들이 탁탁 익어터지는 여름에 태여났으니 망정이지 동지섣달 추울 때 태여났더라면 나는 세상을 보자마자 추위에 떨어야 했을것이다. 비록 태여난 계절이 좋아서 추운 고생은 하지 않았지만 동년시절 내내 나는 가음속으로 추위를 느껴야 했다.

가끔 동년의 아득한 기억을 뒤질라치면 나는 가슴속밑자락에 던져져있는 아픈 그림 한장을 보게 된다.

“계급의 적을 타도하자- 타도하자-”

여린 가슴에 공포를 심어주는 큰 웨침소리와 함께 목에 “개패”를 멘 한무리의 사람들이 병이네 집 굽인돌이를 돌아 탁아소 앞길로 지나간다. 그것을 보려고 우리 코흘리개들이 탁아소를 빙 둘러막은 울바자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부여잡고 울바자쯤으로 공포어린 눈길을 날린다.

네살나던 그해 고약하게 무덥던 어느 여름날, 나는 분명 타도해야할 사람들속에서 목에 “개패”를 멘 아버지를 보았었다.

“그날 네가 탁아소할매의 손을 잡고 ‘우리 아빠가 왜 나쁜 사람이냐?’고 하면서 그렇게 슬피 울더란다.”

어머니는 그후 기회만 있으면 나에게 그날의 정경을 이야기해주셨다. 그날 내가 정말 탁아소할매의 손을 잡고 그렇게 슬피 울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목에 “개패”를 멘 아버지를 보는 순간 덮쳐오던 그 공포만은 지금도 가슴을 허빈다.

그날부터 나는 아버지가 그토록 무섭게 생각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인분냄새가 그처럼 역겹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하방”을 해서 얼마 안되여서부터15년간 마을의 변소를 도맡아 치셨다. 가끔 친구들과 함께 어느 골목에서 뛰놀다가도 누군가 “똥푸개가 온다-” 하고 소리치면 나는 살 맞은 노루처럼 어딘가 숨을 곳을 찾아헤맸다.

친구들을 피해서 아버지의 똥차를 피해서 스스로 몸을 숨기곤 하던 곳이 바로 마을 뒤산이였다. 떫은 개살구 몇알이 디룽디룽 달린 살구나무가 띠염띠염 서있는 마을 뒤산은 그 시절 나의 눈에 웬간해선 오르기 힘든 높은 산으로 보였다. 기분 나쁜 일이 있은 날이면 나는 이를 옥물고 오솔길을 따라 산꼭대기까지 기여오르군 했다.

나는 가는 목을 길게 빼들고 겁기 어린 눈으로 고향마을을 둘러보군했다.

룡문이라고 부르는 나의 고향마을은 평강벌 제일 서쪽에 자리잡고있었다. 하얀 회칠을 한 초가집들이 게딱지처럼 옹기종기 둘러 앉은 작은 마을이였지만 그래도 공사혁명위원회가 자리잡고있어서 “공사마을”로 불리웠다.

마을 서쪽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면 마을에서 제일 높은 산- 노루목산이 자리하고있었다. 그 노루목산을 파헤쳐 돌을 캐다 저수지를 수건한다고 당시 온 마을이 들끓고있었다. 마을은 산지사방에서 모여온 민공들때문에 여간만 흥성하지 않았다. 밤만 자고나면 어제 밤에 상해지식청년들 하고 민공들이 싸움을 했는데 누군가는 맞아서 머리가 터졌다는둥 어느 집에는 칼에 찍혀서 밸이 밖으로 나온 민공이 들어와 숨겨달라고 애원했다는둥 하는 소문들이 옛말처럼 나돌았다.

저수지가 준공되면 그 물로 대량의 수전을 풀수 있는데 그때면 우리 마을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70리평강벌이 곡창으로 변하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 또래들은 곡창이 무엇이고 저수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그때 저수지수건때문에 가끔 흐르는 물을 가두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면 물이 찐 강의 조약돌들 사이에서 한뽐씩하는 버들치들이 팔딱였다. 우리는 기회를 놓칠세라 강변으로 뛰여가서 그것을 줏는 재미에 해가 떨어지는줄을 몰랐다.

우리 마을에서 동북쪽으로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유서 깊은 약수동항일근거지가 있다. 그 시절 마을에서는 가끔 계급의 적들을 투쟁하는 활동을 약수동항일근거지의 큰 버드나무아래에서 벌렸는데 우리들도 어른들의 뒤를 따라 가곤했다. 적들에게 붙잡힌후 모진 고문에 혹시나 혁명의 비밀을 루설할가봐 스스로 혀를 깨물어 목숨을 받쳤다는 김순희렬사에 대한 이야기는 그대로가 생동한 전통교육교과서였다. 나는 김순희렬사가 혀를 깨물어 끊을 때 얼마나 아팠을가 하는 생각을 굴려보군 했다.

“우리 룡문은 이렇게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곳이란다. 거기다 룡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전설이 있는 고장이기도 하니 언젠가는 우리 마을에서 룡이 솟아오르게 될것이다.”

마을 어른들은 이렇게 우리의 동심에 고운 꿈을 심어주셨다

하지만 내 동년의 파아란 터전에서는 고향에 대한 아롱진 꿈이 싹트지 못하고있었다. 나는 “똥푸개가 온다”고 소리치는 고향친구들이 싫었고 아버지의 똥차가 지나다니는 고향마을이 싫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열심히 마을의 변소를 쳤지만 공수는 팔부밖에 받지 못했다. 어머니도 늘 앓음자랑을 하여 제대로 일을 못했기에 남들처럼 공수를 올리지 못하셨다. 내가 여섯살 나던 해에 큰 누님이 시집을 갔지만 형님 두분에 작은 누님 그리고 나까지 네 자식이 한창 커갈 때라 우리 집은 늘 보리고개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어머니는 생활지책으로 생활이 유족한 “공인”집에 가서 옥수수쌀을 꾸고는 한근에 십전씩 웃돈을 받아 생활비로 쓰셨다. 가을에 민식을 타면 입쌀로 물어주군했다. 하얀 입쌀을 이고 “공인”집으로 물어주러 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농민으로 사는 우리 집이 그렇게 싫을수가 없었다. 나만이라도 커서 꼭 “공인”이 되고싶었다. 누가 배워준것도 아니지만 그 시절 나의 머리속에서는 “공인”으로 되자면 꼭 이 마을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똬리를 틀고있었다.

그 시절 나에게 있어서 군음식은 상상할수도 없는것이였다. 그래서인지 간혹 다른집들에서 튀겨 먹는 옥수수튀김이나 닦아 먹는 콩닦깨가 그렇게 부러울수 없었다.

어머니는 겨울나이준비로 해마다 메주를 쑤셨다. 나는 메주를 쑤는 날이 명절처럼 생각되였다. 오후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톺을 때면 메주콩이 흐믈흐믈 익어번져졌다. 그러면 어머니는 나에게 메주콩을 한주걱 퍼주셨다. 나는 메주콩을 실에 꿰여 뒤울안에 쌓아놓은 벼짚무지의 하얀 눈우에 올려놓았다. 얼마 안있으면 메주콩이 살짝 얼게 되는데 그때면 실에 꿴 메주콩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나가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한알씩 뜯어먹기도 했다. 그리고 메주콩을 신문지에 싸서 들고다니며 군음식처럼 먹기도 했다.

그해도 내가 메주콩을 신문지에 싸들고 학교운동장으로 나가니 병이랑 봉호랑 몇몇이 술래잡기를 하고있었다. 내가 그들의 놀이를 구경하며 메주콩을 먹고있는데 술래잡기를 하던 병이가 내쪽으로 다가와 메주콩을 달라고 했다. 나는 아까왔지만 그래도 몇알을 주었다. 나도 아까와 알을 세여 먹는 메주콩을 병이는 한입에 털어넣고는 또 달라는것이였다. 나는 안준다고 빽 톨아졌다. 그러자 병이가 나의 손에서 메주콩을 나꾸어채는것이였다. 나는 안주겠다고 뻗히고 병이는 달라고 싱갱이질을 하는 사이 메주콩은 땅에 떨어졌다. 나는 분해서 병이의 멱살을 잡았지만 그보다 키가 작은지라 인차 그에게 휘둘려 땅에 동댕이쳐졌다. 병이는 나를 타고앉아 주먹을 날렸다. 병이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나의 관심은 싸움에 있은것이 아니라 땅에 널린 메주콩에 가있었다. 나는 병이의 주먹이 떨어지지 않는 틈을 타서 땅에 널린 메주콩을 주어 먹었다. 그 옆을 지나가던 마을형님들이 그 광경을 보고 병이를 뜯어내여 쫓아버렸다.

2년전 어느 모임에서 옛날 나와 병이의 싸움을 구경했던 마을형님이 나의 뚱뚱한 체구를 보고 “너 참 몸이 좋구나. 너 그 일이 생각나니?” 하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여 아릿한 추억과 함께 한바탕 웃던 기억이 새롭다.+

그날 병이에게 얻어맞아서 머리에 큼직한 혹을 달고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는 너무도 가슴 아파서 말없이 나를 꼭 껴안아주셨다. 그 광경을 보던 작은누나가 너무도 분해서 병이네 집으로 찾아가 병이를 혼내주겠다고 펄펄 뛰였다. 어머니가 그러는 누나를 눌러앉혔다.

“순희야, 관둬라. 애들이 자라는게 그렇지. 그 애도 얼마나 먹고싶었으면 그랬겠냐.”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남의걸 빼앗으면서 제쪽에서 때린다오?”

“그 애가 원래 먹고싶으면 그렇게 못 참는다더라. 지난번에는…”

어머니는 나의 등을 다독이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며칠전에 병이네 집에 친척이 왔었다고 했다. 병이 어머니는 손님상에 맨 김치를 올릴수가 없어 애지중지 모아두었던 닭알을 한 접시 튀겼단다. 닭알튀김을 본 병이가 기어코 그것을 먹겠다고 칭얼댔단다. 먼저 병이에게 먹이면 한 접시가 차지 않을것 같아서 병이 어머니가 병이에게 말했단다.

“병이야, 먼저 손님상에 올렸다가 손님이 남긴면 그것을 너에게 다 줄게 응?”

“그러다가 손님이 다 먹으면?”

“애두, 손님이 어떻게 그것을 다 먹니? 손님도 체면이라는게 있는데.”

그래서 병이는 그렇게 하기로 어머니의 다짐을 받은후 먼저 손님상에 올리기로 했단다.

손님의 식사가 시작되자 병이는 사이문쯤으로 손님상을 살폈단다.

한참 지나자 병이가 어머니쪽으로 다가와 귀속말로 닭알튀김이 쬐꼼밖에 안남았다고 알리더란다.

“그래, 인젠 손님이 거의 잡술 때가 됐으니 그걸 남길거다.”

병이 어머니의 말에 병이는 또 사이문쪽으로 가서 문쯤으로 들여다보았단다. 손님이 접시에 남은 마지막 한점의 닭알튀김을 입에 넣는 순간 병이는 “봐라, 저 체면 없는게 닭알을 다 먹는다.” 하고 소리치며 발버둥질을 쳤다고 한다.

병이 어머니가 그 가슴 아프던 일을 아낙네들이 있는데서 말해서 옛말로 전해지게 되였던것이다.

“우리 동이는 그렇게 안하지? 얼마나 헴이 들었다구. 병이는 그렇게 먹고싶은걸 참지 못하는 애라서 오늘 우리 동이의것을 빼앗아 먹은게지. 쯧쯧쯧… 불쌍한것들이…”

그후부터 나는 병이를 보면 “봐라, 저 체면 없는게 닭알을 다 먹는다.” 하는 말이 자꾸 생각나서 웃음이 터지는것을 겨우 참았다…

어떻게 하면 이 마을을 벗어날수 있을가?

웬일인지 그때는 고향마을만 벗어나면 “공인”으로 되여 언제나 행복할수 있을것 같았다. 하지만 당시는 아버지의 “력사문제”가 있어서 고향마을을 벗어난다는것이 불가능할것 같았다. 연변대학 정치계에 붙었다고 마을 처녀들의 흠모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목책이나 만년필 같은것을 선물로 받기까지 했던 큰형님이 아버지의 “력사문제”때문에 다시 마을에 눌러앉았고 공군 어느 부대로 뽑혀간다던 둘째형님도 아버지의 “력사문제”때문에 퇴자를 맞고 말았다. 아버지의 “력사문제”때문에 나도 영원히 이 마을에서 똥차를 모는 아버지를 보며 살아야겠구나 하는 절망감은 애어린 나의 가슴에 그렇게도 깊은 락인을 찍어주었다.

언제나 기분이 소침해 있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늘 “집이 이렇기때문에 뭐나 남들보다 잘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셨다. 그 시절 어머니의 말씀은 유일한 나의 희망이였다. 하여 나는 죽기내기로 공부를 했고 남들의 앞장에 서서 좋은 일을 찾아했다.

나는 소학교 4학년때부터는 집식구들의 반대도 마다하고 우리 생산대의 신문배달을 혼자서 맡아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문을 배달하는 내가 귀엽다고 마을 아주머니들이 자기들 저녁상에 올렸던 삶은 감자라도 손에 쥐여줄 때면 그렇게 가슴이 뿌듯할수가 없었다.

그때 마을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던 리동준선생님이 “꼬마배달원”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사적을 써서 연변인민방송국에 보냈는데 소년아동방송시간에 방송되였다.

1980년 중학교 2학년때 우리는 조선어문시간에 “통신을 어떻게 쓸것인가?” 하는 내용을 배우게 되였다. 그날 선생님께서 신변의 사실로 통신을 한편씩 써오라는 숙제를 냈다. 어렵잖게 통신 한편을 써서 이튿날에 바쳤는데 그때 우리 학급 조선어문과를 맡으셨던 류미옥선생님께서 95점을 매겨주셨다.

기분이 날것 같았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바람으로 생산대 담배기술원 김룡범아바이의 사적을 통신으로 써서《연변일보》사에 투고했다. 생각밖에도 보름만에 나의 통신이《연변일보》에 실렸다. 15살에 나는 중학생이 쓴 통신이 《연변일보》에 발표됐다는것은 그때 크지 않은 우리 마을에서 일대 뉴스였다. 어른들은 만날 때마다 나의 어깨를 다독여주었고 친구들은 원고료를 받아서 뭘 했느냐며 부러워들 했다. 당금 작가로 될것만 같았다. 작가가 되면 꼭 고향마을을 벗어날수 있을것 같았다. 나는 그해 열한편의 통신과 소식을 《연변일보》에 발표했다. 그러느라니 공부는 뒤전이였다. 통신을 쓰고 소설책을 보고 하는것이 나의 일과였다. 그러다가 고리끼처럼 “사회대학”을 다닌다며 식구들의 권고도 마다하고 중학교를 자퇴해버렸다.

이듬해 5월, 십여년간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고 일곱달후 아버지마저 병으로 세상뜨셨다.

아버지어머니를 묻은 장성덕을 바라볼 때면 그렇다할 락 한번 누려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인생이 억울하게 느껴졌고 저으기 몰려오는 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가슴을 떨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사회를 떠돌며 방황하는 나를 보고 형님들이 다시 공부를 하라고 권고했다. 그때는 형님누나들이 모두 벌어서 생활도 나를 공부시킬 형편은 되였다.

이듬해 나는 화룡현 두도진 광흥중학교 초중부2학년에 들어갔다. 학교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큰누님네 집에서 다니기로 했다. 처음에는 10여리 길을 걸어서 통학을 했다. 나는 열심히 학교공부를 하는 한편 문학습작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1년, 16살 나던 해에 나는 처녀작 아동소설 “나의 동생”을 연변인민출판사《시내물》총서에 발표했다.

한동안 놓았던 공부여서그런지 어딘가 힘에 부쳤다. 문과쪽은 그런대로 노력하면 성적이 올라갔지만 리과쪽은 점점 따라가기 힘들었다. 자기 자식 셋에 나까지 넷을 돌보느라 날마다 허리 펼새 없는 누나와 매형을 보기도 미안했다.

나는 또다시 공부를 포기하고 홀로서기를 위해 결연히 해방군에 입대하기로 했다.

1982년 11월 5일, 우리 공사에서 입대하는 17명의 신병들은 해방패자동차에 앉아서 화룡으로 떠나게 되였다. 그날따라 날씨는 무엇에 체한 아낙네의 심술 궂은 얼굴처럼 찌부퉁해있었다. 나는 마을을 벗어나는 자동차우에서 아버지어머니가 나란히 묻혀있는 장성덕을 바라보았고 그렇게도 벗어나고싶었던 고향마을을 둘러보았다.누구나 권고하는 공부를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가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아버지어머니, 이 막내아들은 오늘로 영영 고향을 떠납니다. 아픔만 남아있는 이 곳을 떠나서 새 사람으로 태여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향에서 한 약속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나의 다짐이였고 성숙되지 못한 젊음의 오기였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바로 고향에 남겨둔 그날의 그 다짐이 굽이 많던 내 인생행로에서 지팡이가 되고 힘이 되지 않았나싶다.

미움도 방황도 절망도 많았던 고향, 지금와서 돌이켜보아도 알알하게 가슴 쓰리지만 그래도 떠올리면 그리워나는것은 또 무엇때문일가?

미워도 그리운 고향이라고 되뇌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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