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 형수님께
그동안 '새시대'의 구호와 표어로 갈아붙이느라 몹시 바쁜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다리를 올라가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글씨가 바른지 삐뚤어졌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코끼리 앞에 선 장님의 막연함 같은 것입니다. 저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봄으로써 겨우 바른 글씨를 쓸 수 있었습니다.
'푸른 과실이 햇빛을 마시고 제 속의 쓰고 신 물을 달고 향기로운 즙으로 만들 듯이' 저도 이 가을에는 하루하루의 아픈 경험들을 양지바른 생각의 지붕에 널어, 소중한 겨울의 양식으로 갈무리하려고 합니다.
1980.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