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붓글씨 부모님께
'춘하동동'(春夏冬冬). 아예 추(秋) 대신 동(冬)을 더 넣어서 금년의 이른 추위를 이렇게 표현하는가 봅니다. 원래 봄가을이 없다시피한 교도소의 계절이 '하하동동'(夏夏冬冬)이고 보면 금년이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습니다. 추위와 더위, 피로나 졸림, 주림 같은, 자연에서 오거나 몸으로 느끼는 고통은, 정신의 특별한 훼손이 없이 감내해나갈 수 있는 지극히 작은 것, 고통이라기보다 산다는 표시이고 삶의 구체적 조건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달의 어머님 하서, 그리고 7일부 아버님 하서 모두 잘 받았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물론 연로하신 탓이라 믿습니다만 좋은 스승인 아버님을 곁에 두시고도 글씨가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머님의 서투른 글씨와 옛 받침이 좋습니다. 요즈음의 한글 서도는 대체로 궁중에서 쓰던 소위 '궁체'를 본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저는 궁정인들의 고급한 아취(雅趣)보다는, 천자문의 절반인 '지게 호(戶)' '봉할 봉(封)'까지만 외우시는 어머님께서 목청 가다듬고 두루마리 제문(祭文)을 읽으실 때, 옆에 둘러앉아서 공감하시던 숙모님들, 먼 친척 아주머니들처럼 순박한 농부(農婦)와 누항(陋巷)의 체취가 배인, 그런 글씨를 써보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친근감을 느낄 수 있고 나도 쓰면 쓰겠다는 자신감을 주는 수수한 글씨를 쓰고 싶습니다.
상주(詳註)된 {시경}(詩經) 한 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계수님 편지에서 아버님 생신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1980.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