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 같은 접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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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 같은 접견
부모님께


벽에 기대어 앉을 때 저는, 결코 벽 기대어 앉으시는 일 없으신 아버님을 생각합니다. 간결한 대화, 절제된 감정으로 그 짧은 접견시간마저 얼마큼씩 남기시는 아버님의 접견은, 한마디라도 더 실으려고 마지막까지 매달리는 여느 사람들의 접견과는 대조적으로, 흡사 여백이 넉넉한 한 폭 산수화의 분위기입니다.
한국의 근세를 읽으면서 저는, 가혹한 식민지의 시절을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 사셨던 아버님의 고뇌와, 지금은 기억조차 불가능한, 다섯 살의 저에게 '항일'(抗日)을 가르치던 아버님의 지우(知友)들의 고뇌까지도 함께 읽게 됩니다.
세모를 맞이하여 아버님의 하서를 다시 챙겨봅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알고 가르쳐주는 붓글씨 피봉의 편지 속에는 한 해 동안 기울여주신 어머님, 아버님의 염려와 옥바라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수식(修飾)과 감상 등 일체의 낭비가 배제된 그 담담한 문맥과 행간에서 저는, 저희들의 세대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번쩍 정신이 드는 순간순간을 경험합니다.
한 해가 저물 녘이면 늘 어머님의 건강이 걱정됩니다. 그러나 젊으실 때 자주 편찮으신 어머님의 잔병치레가 하수(遐壽)를 위한 액땜이 되시고, 지금까지도 줄지 않는 타고나신 일복이 건강의 비결이 되신 것이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지금은 참고 계신 말씀이 많으신 줄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항상 너른 마음으로 견디시길 바랍니다.
새해에는 가내에 기쁜 소식이 많으시길 빌며 절 대신 글 올립니다.

 

 

1980.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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