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아픈 채찍 계수님께
기상시간 전에 옆사람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뽑아 벽 기대어 앉으면 써늘한 벽의 냉기가 나를 깨우기 시작합니다. 나에게는 이때가 하루의 가장 맑은 시간입니다.
겪은 일, 읽은 글, 만난 인정, 들은 사정……. 밤의 긴 터널 속에서 여과된 어제의 역사들이 내 생각의 서가(書架)에 가지런히 정돈되는 시간입니다. 금년도 며칠 남지 않은 오늘 새벽은 눈 뒤끝의 매운 바람이, 세월의 아픈 채찍이, 불혹의 나이가 준엄한 음성으로 나의 현재를 묻습니다.
손가락을 베이면 그 상처의 통증으로 하여 다친 손가락이 각성되고 보호된다는 그 아픔의 참뜻을 모르지 않으면서, 성급한 충동보다는, 한 번의 용맹보다는, 결과로서 수용되는 지혜보다는, 면면(綿綿)한 기도(企圖)가, 매일매일의 약속이, 과정에 널린 우직한 아픔이 우리의 깊은 내면을, 우리의 높은 정신을 이룩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스스로 충동에 능하고, 우연에 승하고, 아픔에 겨워하며 매양 매듭 고운 손 수월한 안거(安居)에 연연한 채 한 마리 미운 오리새끼로 자신을 한정해오지나 않았는지…….
하처추풍지 고객최선문(何處秋風至 孤客最先聞). 겨울 바람은 겨울 나그네가 가장 먼저 듣는 법. 세모의 이 맑은 시간에 나는 내가 가장 먼저 깨달을 수 있는 생각에 정일(精一)하려고 합니다.
'겨울을 춥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신을 비극의 복판에 두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오만을 찌르는 글이었습니다.
화용이, 민용이는 시골 아이같이 튼튼해 보입니다.
새해에는 여러 사람과 나누어야 할 만큼 큰 기쁨이 있길 빌면서 하정(賀正)에 대(代)합니다.
1980. 1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