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종이범”이 아니셨다

by 최동일 posted Nov 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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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종이범”이 아니셨다
최동일


어머니는 아버지를 “종이범”이라고 하셨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그만치 못마땅한 존재로 보이셨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말없이 어머니의 눈치를 살펴가면서 잔일들을 찾아하시느라고 무척 애를 쓰다가도 일단 술만 몇잔 마시고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시였다.
“나는 범이다.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어느땐가 나도 ‘따웅—’ 하고 소리칠 때가 있을기다. 꺾이면 꺾였지 네놈들에게 굽어들지는 않는다. 암 그래 내가 범이지, 범은 죽을 때 ‘따웅—’ 하고 소리치는기라.”
아버지께서 겨릅대같은 팔을 홰홰 내저으시며 “범타령”을 할라치면 어머니는 어이없다는듯 물끄러미 아버지를 바라보시다가 한마디씩 하셨다.
“얘, 아버지를 좀 봐라. 당신이 범이라신다.  ‘종이범’이면 또 모를가. 한평생 ‘똥푸개’를 하시면서…”
“ ‘똥푸개’면 어떤가? 누가 내만치 똥을 잘 푸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구 해라.누가 그 일을 내처럼 잘할수 있는가? 암, 나는 범이다.”
“그래, 좋겠습꾸마. 똥 잘 푸는 범이돼서…”
어머니가 곁에서 그렇게 비꼬으셔도 아버지는 혼자서 중얼중얼 “범타령”을 하시다가 지쳐야 잠에 곯아떨어지시군 하셨다,.
입을 “하—” 벌리리고 느침까지 흘리시며 단잠에 빠져버리신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때 “아버지는 진찌 ‘범’일가 아니면 ‘종이범’일가?” 하고 유치한 생각을 굴려보았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네살 때로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
그날도 탁아소에서 시름없이 놀고있는데 난데없는 꽹과리 소리가 들여왔다. 우리  또래들은 그 소리에 홀려 마당에 나가 바자굽에 붙어서서 소리나는쪽을 바라보았다.상호네 집 굽인도리에서 꼬깔모자를 쓰고 목에 개패를 건 사람들이 줄을 지어오고있었는데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이 꽹과리를 두드리고있었다. 나의 머리속에서는 “나쁜 놈들을 투쟁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 “나쁜 놈”들속에서 놀랍게도 꼬깔모자에 개패를 건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도 나쁜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더럭 겁이나서 울음을 터뜨리며 “탁아소아매”한테로 달려갔다. 그날 내가 얼마나 슬피 울었던지 그후에도 “탁아소아매”는 나의 어머니를 보기만 하면 “어린것이 뭘 알았던지 그렇게 슬피 울더라니께. 그래서 나도 얘를 따라 울었다니께.” 하고 말씀하셨다 한다.
그날 밤에도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셔서 여느날과 다름없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곱드라니 아버지에게 머리를 들이대고있을수 없었다. 아버지가 무서웠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던것이다.
정말이지 그날의 그 느낌은 아버지의 몸에서 일년내내 풍기는 그 인분냄새보다도 더 싫고 역겨운것 같았다.
세상과 대화하면서부터 나는 아버지의 몸에서 나는 인분냄새를 맡아야 했다.
딱히 어느해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자청을 해서 생산대의 변소를 치는 일을 도맡으셨다고 한다. 워낙 지저분하고 힘든 일이라 누구도 나서지 않고있던차에 아버지께서 자청을 하는지라   생산대에서는 지력이 차한 일군 한명을 아버지에게 붙여주면서 그 일을 떠맡기셨던것이다.  
일년사시절 당나귀를 메운 인분수레를 몰고 집집을 찾아다니시며 변소를 쳤기에 아버지의 몸에서는 언제나 인분냄새가 떠날줄을 몰랐다. 형님, 누나들은 성장하면서 차츰 아버지에게 많은 불만을 가지고있었다. 특히 작은 누나는 “아버지때문에 얼굴을 들고다니지 못하겠다.” 면서 다른 일을 바꾸어 달라고 생산대에 제기하라고 아버지에게 지청구를 하셨다.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가타부타 아무말 없으시다가는 아침에 또 일을 나가시군 했다.
아버지는 원래 화룡현 룡수토산에서 소문난 황연기술원이셨다 한다. 아버지는 뛰여난 솜씨로 일터에서 한창 솜씨를 펴다가  갑자기 “현행반혁명”이라는 모자를 쓰게 되셨던것이다.  1961년에 아버지는 “현행반혁명분자”라는 모자를 쓴채  어머니와 나의 형님누나들  넷을 거느리고 화룡현 룡문이라는 곳으로 쫓기워오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43세에 나를 낳으셨다.
그때 식구들은 모두 아버지를 바라보고 살았다. 어머니는 병때문에 일년내내 가벼운 일밖에 못했기에 하루에  8부밖에 받지 못하셨다. 하여 가정살림은 막막하기로 이를데없었다. 해마다 보리고개를 넘기지도 못하고 쌀독이 굽이나면 어머니는 “공인집”에 가서 옥수수쌀을 꾸어다먹고 가을에 입쌀을 물어주군 했었다. 어머니는 그 사이에서 약간씩 벗겨내는 웃돈으로 우리의 학용품같은것을 사주셨다.
독한 인분냄새를 일년내내 맡으면서도 기름냄새 한번 제대로 맡아보지 못했던지라 아버지의 심신은 억수로 찌들리신것 같았다.  
어느해 여름, 아버지께서는 아동저수지쪽에 있는 인분구뎅이에 인분을 싣고갔다가 부식되여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돼지대가리 하나를 얻어오셨다. 아동저수지공지식당에서 버리려는것을 가져왔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도 코를 싸쥐고 당장 던져버리라고 하셨다.
“왜, 푹 삶으면 아직 먹을만 하겠능게.”
어머니의 잔사설도 못들은척하고 아버지께서는 직접 소래에 돼지대가리를 담아들고 강변에 나가 검질을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뒤울안에 림시 가마를 걸어놓고 깨끗하게 검질을 한 돼지대가리를 삶기 시작했다. 고기가 익어갈수록 냄새는 더 지독하게 퍼졌다.
작은 누나가 코를 싸쥐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온 동네 개들이 다 찾아왔으꾸마.”
아니나다를가 응산이네 개며 쑈산이네 개며 동범이네 개며… 마을의 개들이 총 출동하여  돼지대가리를  끓이는 가마곁에서 어슬렁거리고있었다.
그날 저녁부터 아버지께서는 돼지대가리고기를 뜯어서 자시기 시작했다. 식구들이 모두 나무라는지라 아버지께서는 집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 앉아서 고기를 간장에 뚝뚝 찍어 그렇게도 억척스럽게  잡수셨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 고기를 잡수시려고 태여나신분 같았다.  어머니께서도 더는 뭐라고 하시지 못하고 집안에서 멀거니 아버지를 바라보셨다.
그날 밤중에 깨여나보니 아버지께서는 또 밖에 나가 고기를 잡수셨고 어머니는 그러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눈굽을 찍고 계셨다. 나는 그러는 어머니가 무서워 어머니의 무릎에 다가가 앉았다. 어머니께서는 말없이 나를 꼭 끌어안아주셨다. 아버지께서는 그 며칠 고기를 비닐주머니에 담아서 흐르는 도랑물에 잠그어두시고 가끔 그렇게 꺼내 잡수셨지만 그로 하여 몸에 별 이상이 생기지는 않으셨다.
그처럼 어려운 가정살림에도 아버지께서는 해마다 《연변일보》를 꼭 주문하셨다. 아버지는 매일 저녁을 자신후 목침을 베고 잠간 누우셨다가 일어나 그날 신문을 찾아드셨다. 아버지지께서는 신문을 눈에서 멀리쩍하게 들고는 마치도 노래를 하시듯 별나게 중얼중얼 곡을 넣어 읽으셨다.
나는 그러는 아버지가 재밌게 느껴져 곁으로 다가가 “아부지, 왜 창가처럼 신문을 봄둥?” 하고 물은적이 있다. 아버지는 그러는 나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글을 배워서 그렇지.” 하고 대답하시면서 나를 당겨다 무릎에 앉치고는 계속 노래처럼 신문을 읽으셨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통하여  이 세상에 “최고지시”라는것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혼자만 신문을 읽은것이 아니라 우리 형제자매들에게도 늘 신문을 읽으라고 요구하셨다.  “배워야 큰 사람이 된다.”는게 아버지의 삶의 신조셨다.
그때 마을에는 손버릇이 나빠서 늘 남들의 입에 오르는 한 가족이 있었는데 그 집의  누가 어느집 자류지에서 옥수수를 따다가 들켰소, 누구네 호박을 돼지풀속에 숨겨오다가 들켰소 하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렸다.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늘 “사람은 손끝이 깨끗해야 쓰네라. 굶어죽어도 남의 물건에 가만히 손을 대면 사람구실을 못하네라.” 하고 한마디씩 하군 하셨다.
큰형이 장가를 들던 해 겨울이였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아버지께서는 며칠전에 돼지를 팔아 마련한 돈을 들고 함에 넣을 호랑탄자를 사러 투도로 가셨다.
그날밤, 아버지께서는 예산보다 퍽 늦게 귀가하셨는데 코등이 퉁퉁 부어있었다. 어머니께서 놀라시며 웬 일인가고 물으셨다. 아버지께서는 투도에 가서 호랑탄자를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연풍에 있는 큰누나네 집에 들려 술을 마셨다는것이였다. 그후  어둠을  헤치며 강뚝을 따라오다가  넘어졌는데 돌멩이에 코등을 쪼았던것이다. 아버지는 쓸어진채로 숱한 피를 쏟으셨다고 했다.
곁사람이 보기에도 상처가 몹시 아플것 같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런 일이 없는듯 아예 개의치 않으시고 “허허허…”  통쾌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제일 좋은 호랑탄자를 골랐다니까. 이 호랑탄자에 범같이 날 쌘 손주놈을 싸안게 됐다니까. 허허허… 내가 누구라구.”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한참이나 “범타령”을 하시다가 갑자기 꺼이꺼이 황소울음을 터치셨다.
“왜 또 그럼둥, 집이 부산하게…”
어머니께서 불안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나무라셨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호랑탄자를 당겨안으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높이높이 소리치셨다.
“그래 내가 범이다. 누가 나만치 변소를 잘 치는가 나와보라구 해라. 이 놈들, 내가 누구라구. 꺾이면 껶였지 굽어들지는 않는다. 내 새끼들은 시라소니가 없다. 이제 우리 집에서 숱한 범들이 나올기다. 범은 죽을 때 ‘따웅—’ 하고 소리를 치는기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무엇에 꽉 막히셨던지 부르르 떨리는것 같았다. 그러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어머니도 머리를 외로 꼬셨다.
그 무렵,  20대중반부터 생산대 업무대장과 대대 민병련 련장으로 활약하던 큰형님이 연변대학 정치학부의 입학통지서를 기다리다가 아버지의 력사문제로 하여 정치심사에서 떨어졌고 작은형님은 어느 공군부대에 뽑혀가기로 했다가 역시 아버지의 력사문제때문에 정치심사에서 떨어져 의기소침해있었던것이다.
그 일들은 아버지의 가슴에 그대로 돌덩이가 되여 남아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평소 자식들앞에서 좀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1982년 1월 3일, 무던히도 춥던 그날밤에 아버지께서는 59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일곱달전에 어머니를 먼저 보내시고 하루하루 병자랑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끝내 간경화복수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던것이다. 그때는 형님누나들이 다 장성하신후라  집 살림도 얼마간 펴이셔서 “최령감이 복이 터지게 될” 때였다.
“아버지께서 지금도 살아계신다면 무럭무럭 자라나는 손군들을 지켜보면서 뭐라고 말씀하실가?”
형님누나들은 자식들을  “범”으로 키우겠다는 신념 하나로 모두들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오셨다. 아버지께서 구천에서 지금 손군들의 모습을 보신다면 아마 또다시 “나는 범이다. 내 새끼들은 시라소니가 없다.” 하고 목청을 돋구실것이다.
조카들속에는 지금 기자, 대학교 교수, 컴퓨터소프트웨어설계사, 호사, 외자기업부문경리가 있다. 특히 큰누나네 둘째 아들은 카나다에서 박사후를 마치고 지금 중국과학원 화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사업하고있다.
“물질상에서 아버지가 우리에게 물려준것은 빚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꺾이면 껶였지 굽어들지 않는’  값진 정신을 물려받았다.”
지금도 가족들이 모여앉으면 큰형님은 가끔 이렇게 “령도강화”를 하신다.
세상의 불의에 눌리워 살면서 아버지께서는 “꺾이면 껶였지 굽어들지 않는 그 정신”을 “범”이라는  맹수에 기탁하여 세상앞에 시위하신것은 아니셨을가?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께서는 어쩜 아버지를 잘 모르셨던것 같다.
그랬다.  
“꺾이면 껶였지 굽어들지 않는 정신”을 가슴깊이 숨겨두시고 십여년간 당당하게 인분차를 몰면서 떳떳하게 살아오신 우리 아버지—최기춘.
아버지는 진정 한마리의 굴강한 범으로 되여 오늘도 나의 가슴속에 살아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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