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심에 대해

by 김자년 posted Dec 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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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심에 대해

‘더럽거나 깨끗한 것은 본래 없으므로 분별심을 내지 말라’고 하는 말은,
더럽거나 깨끗한 것이 없으므로 더럽게 살아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더러운 것은 싫고 깨끗한 것은 좋다는 분별심이 없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 적절하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선하거나 악한 것은 본래 없으므로 분별심을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없으므로 악하게 살아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악한 것은 싫고 선한 것은 좋다는 분별심이 없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 적절하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즉, 분별심이란 ‘서로 구별되는 것’에 ‘좋다 싫다’는 관념을 부가하는 것이며, 이 호불호好不好의 분별심에 따라 행위하는 것을 구업(말)과 신업(행동)을 짓는다고 하는 것이다.
‘쾌불쾌의 느낌(수受)’과 ‘호불호의 관념(상想)’과 ‘호불호의 분별심에 따른 행위(행行)’는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상想도 ‘호불호의 분별심이 있는 상想’과  ‘호불호의 분별심이 없는 상想’으로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호불호의 분별심이 있는 상想'은 행行에 포함시켜 설명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서적에서는 ‘호불호好不好의 분별심’을 간단히 ‘분별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업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호불호好不好의 분별심’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행위를 하지만 호불호의 분별심에 의해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분별심을 내는 것은 의업意業(마음으로 짓는 업)이고, 분별심에 따라 말을 하는 것은 구업口業(말로 짓는 업)이고, 분별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신업身業(몸으로 짓는 업)이다.
상기 ‘호불호好不好의 분별심’이 바로 탐심貪心이고 진심瞋心이며 치심癡心이다.
붓다나 아라한에게도 느낌이 있고 관념(생각)이 있고 행위가 있지만, ‘호불호好不好의 분별심’과 이 호불호의 분별심에 따른 행行은 없다.
‘행하지만 행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정 사항) 2010/12/12

'호불호의 느낌(수受)'을 '쾌불쾌의 느낌(수受)'으로 쓰는 것이 적절할 것 같아, 본문에서 해당 부분을 정정하였음.

이러한 정정행위는 '호불호의 분별심에 따른 분별행위'가 아니라, 탐진치에 물들지 않은 '적절한 구별행위'로서 '중도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정행위에 정신적 괴로움이 함께 하고 있다면, 자기도 모르게 탐진치에 물든 '호불호의 분별심에 따른 분별행위'라고 할 수 있다.
'쾌불쾌의 느낌' 때문에 정신적 괴로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쾌불쾌의 느낌'에서 '호불호의 분별심'으로 진행되었기에 정신적 괴로움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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