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따리에 고인 세월 형수님께
영치된 책들을 집으로 우송하려고 영치창고로 가서 저의 보따리를 끌러보았습니다. 수많은 보따리들이 번호순으로 어깨를 비비며 비좁은 시렁을 겨우 나누어 앉아 있는가 하면 보따리마다에는 주인을 잘못 만나 엉뚱한 곳에 온 물건들이 기막힌 사연을 담은 채 나프탈린 냄새 속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저의 보따리에도 삐뚤어진 신발과 삭은 옷가지에 10여 년 전의 세월이 그대로 고여 있었습니다. 집으로 우송할 책만 따로 골라서 묶어놓고 나머지는 폐기하였습니다.
빈 보따리 달랑 걸어놓고 돌아오면서 새해도 아닌데 찾아드는 무슨 신선함 같은 느낌에 잠시 의아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항상 새로이 시작하는 마음가짐은 필요하고도 유익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형님 편에 집안 소식 많이 들었습니다. 우용이, 주용이와 함께 형수님께서도 건강하시길 빌며 이만 각필합니다.
1981. 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