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삭발승(靑衣削髮僧) 형수님께
이곳은 태풍의 먼 자락이 가벼이 스쳤을 뿐인데도 사나흘 좋이 낙수가 끊이질 않고, 갯버들 큰가지가 바람에 찢겨 밤새 머리칼로 비질을 하는 등 여간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아침은 자욱한 안개가 빛바랜 옥사(獄舍)의 삭막한 풍경을 포근히 감싸서 부드럽기가 흡사 산수화의 원경(遠景) 같습니다.
옛날에 수염이 길고 지혜 또한 깊은 어느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짙게 서린 무기(霧氣)를 보고 이곳에는 훗날 큰 절이 서리라는 예언을 남기고 표연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예언이란 엇비슷이 적중하는 데에 묘(妙)가 있는가 봅니다. 수천의 청의삭발승(靑衣削髮僧)(?)들이 고행 수도하는 교도소는 가히 큰 절이라 하겠습니다.
'잠 에너지'로 어제의 피곤을 가신 이곳의 우리들은 새벽의 청신한 공기를 양껏 들이마시며 기차처럼 어느새 지나가버릴 쾌청한 가을 날씨를 차마 아까워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을에 저마다 자신을 간추려두는 까닭은 머지않아 겨울이 오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내일 모레가 추석, 사과라도 나누며 친구들과 더불어 우리들의 가을을 이야기하겠습니다.
1981.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