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속에 들어 있는 인생 부모님께
9월 7일자 하서와 서체(書體) 자료, 시조초(時調秒) 모두 잘 받았습니다. 추석 지난 후에 한 번 오시겠다고 하셔서 그간 답상서를 미루어왔었습니다.
보내주신 서체는 역시 명필다운 호연함이 있어 일견 진적(眞蹟)을 대한 듯 조심스러워집니다.
할아버님 비문 써놓았습니다. 다음 접견 때 가져가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써놓은 비문을 며칠 후에 다시 펴보았더니 자획의 대소(大小), 태세(太細)가 고르지 못하고 결구(結構)도 허술하여 마치 등잔을 끄고 쓴 한석봉의 글씨 같아, 저도 어머님께 꾸중 듣는 듯한 마음입니다. 몇 군데 다시 써서 덧붙이기도 하고 조금씩 고치기도 하였습니다.
글씨도 그 속에 인생이 들어 있는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어떤 때는 글씨의 어려움을 알기 위해서 글씨를 쓰고 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중추(中秋)를 맞은 이곳의 저희들은 그동안 잊고 있던 하늘도 한 번씩 올려다보며, 가을걷이 뒤의 허수아비가 되지 않기 위하여 저마다 팔뚝 굵은 광부가 되어 이곳에 묻혀 있는 진실을 향하여 꾸준히 다가서고 있습니다.
어머님께서 꿈에 보이면 혹시 어디 편찮으시지나 않으신지 걱정됩니다. 노령에는 첫추위와 늦추위를 조심하여야 한답니다. 기체 안강하시기 바랍니다.
1981. 9.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