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빼앗긴 국화 형수님께
어제는 재소자들의 가을 운동회날이라 종일 운동장의 가마니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좁은 마당에 잘해야 난장이 곱사춤이라지만 새하얀 직선과 곡선으로 모양을 낸 운동장은 거기 얼룩져 있는 숱한 사람들의 고뇌를 말끔히 씻은 얼굴입니다. 닫힌 문 열고 나온 수인들의 달음박질은 가지각색의 팬티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저만큼 가버린 '가을'을 향한 집요한 추격 같습니다.
국화장(菊花場)의 비닐온실에 밤새 불을 켜놓기에 아마 계사(鷄舍)에 다는 전등불이나 한가지려니만 여겼더니 이것은 꽃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꽃을 누르기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국화는 장야성(長夜性) 식물이기 때문에 밤이 길어야 꽃이 피는 법인데 시장의 꽃값이 비쌀 때 내기 위하여 개화(開花)를 억제해둔다는 것입니다. 춘분도 훨씬 지나 가을밤도 길어졌는데 전등불에 밤을 뺏겨 피지 못하던 꽃들이 며칠 전의 소등(消燈)으로 일제히 꽃 피어났는지 온실에는 꽃 한 송이 보이지 않고 썰렁한 늦가을 바람이 비닐자락을 부풀리고 있습니다.
아버님 다녀가신 편에 집안 소식 잘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고 싱그러운 가을이 가내에 충만하길 빕니다.
1981. 10.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