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巧)와 고(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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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巧)와 고(固)
아버님께


지난 달 28일부 하서와 오당지 잘 받았습니다.
영석이 다녀간 편에 어머님, 아버님 평안을 들었습니다만 저는 또 저 때문에 겨울을 걱정하실 어머님 걱정입니다.
보내주신 종이는 여기 것보다 값도 눅고 결도 고운 것 같습니다. 추워지기 전에 써보고 싶은 글귀를 몇 가지 적어두었습니다만 갈수록 글씨가 어려워져 붓이 쉬이 잡혀지질 않습니다. 자기의 글씨에 대한 스스로의 부족감과, 더러는 이 부족감의 표현이겠습니다만, 글씨에 변화를 주려는 강한 충동 때문에 붓을 잡기가 두려워집니다. 무리하게 변화를 시도하면 자칫 교(巧)로 흘러 아류(亞流)가 되기 쉽고, 반대로 방만(放慢)한 반복은 자칫 고(固)가 되어 답보하기 쉽다고 생각됩니다.
교(巧)는 그 속에 인생이 담기지 않은 껍데기이며, 고(固)는 제가 저를 기준삼는 아집에 불과한 것이고 보면 '윤집궐중'(允執厥中) 역시 그 중(中)을 잡음이 요체라 하겠습니다만, 서체란 어느덧 그 '사람'의 성정(性情)이나 사상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결국은 그 '사람'과 함께 변화, 발전해감이 틀림없음을 알겠습니다.
우차(牛車)가 나아가지 않으면 소를 때리겠느냐 바퀴를 때리겠느냐?는 우문(愚問)이 때로는 우리를 깨우치는 귀중한 물음이 되듯이, 본말을 전도하고 선후를 그르치는 것은 거개가 졸속한 욕심에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겨울이라고 따로 준비할 것이 없습니다. 어머님께서 걱정하시거나 옷을 보내시지 않기 바랍니다.

 

 

1981.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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