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록색의 작은 풀싹 계수님께
어느 목공의 귀재(鬼才)가 나무로 새를 깎아 하늘에 날렸는데 사흘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교를 극한 솜씨가 우리의 생활에 보태는 도움에 있어서는 수레의 바퀴를 짜는 한 평범한 목수를 따르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글씨도 마찬가지여서 '일'(一) 자에서 강물소리가 들리고 '풍'(風) 자에 바람이 인다 한들, 그것이 무엇을 위한 소용인가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서도는, 그 형식에 있어서는 민족적 전통에 비교적 충실한 반면 민중의 미적 감각과는 인연이 멀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동도(東道)를 주체로 삼되 봉건적 한계를 벗지 못하고 있어 명암 반반의 실정임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글씨란 누구의 벽에 무슨 까닭으로 걸리느냐에 따라 그 뜻이 사뭇 달라지고 마는 강한 물신성(物神性)을 생각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결코 무심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일요일 오후, 담요 털러 나가서 양지바른 곳의 모래 흙을 가만히 쓸어보았더니 그 속에 벌써 눈록색의 풀싹이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봄은 무거운 옷을 벗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던 소시민의 감상이 어쩌다 작은 풀싹에 맞는 이야기가 되었나 봅니다.
1982. 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