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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소리

2010.12.20 11:37

잠들지 않는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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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와 생각해보면, 스물일곱의 그 저녁, 어느 PC방 모니터 앞에서 처음으로 <숲>을 만나던 그 순간, 참 순수하고 두근거렸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서른여덟이 되지만, 아무튼 십여 년 동안 <숲>은, 잠들지 않고 계속 <숲>이었구나, 하고 모두모임 내내 생각했습니다.

아마 저도 동영 씨를 따라, 조만간 날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함께 내내 살아갈 친구에게 <숲>을, 들려주지 말고 보여주자고, 함께 간 자리에서, 모두모임이 처음 제게 말을 걸어온 것은, “잠들지 않는 시내”였습니다. 서도반이었지요. 작지만 아름다운 전시회의 풍경 속에서 다소 색깔이 독특했던 선생님의 글씨였습니다.

법정 스님의 어느 산문에서였나요. ‘불일암’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스님의 홀로살이에는 사실 많은 등장인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산이며 새며 나무들이며 바람소리며 비와 눈, 각종 산짐승들이나 개울물 소리, 스님은 잠들어 계셔도 스님이 거하시던 산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는, 잠들지 않는 것들의 부지런함.

다들 잠들지 않고 기어이 잘 살아주고 계신 것 같다는 반가움은 곧이어 제 길고 아둔했던 잠을 일깨웠습니다. ‘그루터기’로 행사를 준비하셨을 뿐 아니라 올 한 해를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분들과 울진이며 강릉, 이른바 ‘동해권’에서 오신 선배님들, 너무 오랜만에 인사 드려 그저 죄송할 뿐이었던 좌 선생님을 비롯해 흡사 이제는 결혼과 초연해 ‘보이시는’ 형 누나들, 아이를 안고 고생하셨던 왕년의 아가씨들, 멀리 봉화에서 오셨던 해사한 느낌의 치과의사선생님, 그리고 만나 뵙지 못한 원배 형이나 동영 씨, 하경 누나나 지영 씨, 아영 씨 등 제 기억 속에서 아른거리는 <숲>의 일부.

선생님께서 독창적 ‘면벽명상’을 통해 찾아내셨다는 친구 분의 말씀 맞다나, 10년이 되었건 신년이 되었건 시간이란 강물과 같이 흘러가는 것인데 어제와 내일의 가름이 무슨 소용일까도 싶지만, 그래도 오랜 동안 떠나 있던 못난이의 죄송함은 빈 자리의 빈 시간을 무겁게 셈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을 애써 땀 흘리시고 지키시고 가꾸어 오신 분들껜 그저 아픈 마음으로 감사드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진호 마음 속 모두모임 풍경이었습니다.

특별히 순환 선배께서 진행해주셨던 ‘뒤풀이’가 계속 기억에 남습니다. ‘밀양(?)’의 부엉이바위와 진석 씨의 아픔들, 성춘 선배의 진솔한 지적과 연이어지던 <숲>의 ‘정직한 오늘’에 관해, 저는 그저 닥치고 아무 말도 여밀 수 없었습니다. 마치 재판과 송사처럼 피고로 소환되어 추궁당하고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왜 그 동안 잠들어 있었느냐는, 어딜 갔다 이제 여기에 나타났느냐는, 지난 날 너는 이곳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잘도 기타 들고 나가서 헤벌쭉 웃어가며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느냐는, 오가는 소묘와 모색과 논의 속에서 저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올 한 해 <숲> 살림을 이렇게까지 꾸려 오신 분들이 내년 살림을 꾸리실 분도 마땅치 않고 해서 “잘 할 때까지 하겠다”고 하신 말씀이 가장 아팠습니다. 그런 아픈 말씀을 그렇게 해맑게 웃으시며 말씀하시니 더 아팠습니다. 노래 제목도 참 아프더군요. “힘내라, 맑은 물”

인생은 영화나 소설처럼 발단-위기-절정-결말의 구조가 아니어서, 그날이 그날이고 무엇 하나 해갈되지 않으며 밋밋하게 천천히 흘러간다는 시시한 소리는 깨닫기도 어렵고 깨달아도 참 어려운 얘긴 것 같습니다. 힘들면 짠, 하고 누군가 위로를 주고 그래서 갈등이 극적으로 해결되고 다들 눈물로 부둥켜 안고, 하는 식의 얘기를 내놨을 때, 지금 드라마 찍냐?, 하고 날아오는 핀잔 속에 인생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은 드라마가 아니며 마라톤도 아니고 도착도 없으며 졸업도 없다는 이 당연한 얘기는 때로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잔인한 마당에 “잘 할 때까지 하겠다”이고, “힘내라, 맑은 물”입니다. 하얀 후드티를 입고 몸을 반쯤 뒤로 젖혀 배들을 훌쭉 내민 상태에서 빨개진 볼과 어색한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어떻게든 열심히 노래합니다. “힘을 내야지, 바다로 가야지” 이 아픔은 부끄러움이, 미안함이, 쪽팔림이, 그저 어쩔 수 없는 마음이 ‘아픔’이라는 가슴으로 서로 부둥켜안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 어느 프로 뮤지션의 공연이 이보다 더 아플 수 있을까, 노래는 성대와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십여 년을 삶으로 살아낸 사람들이 제 온몸과 살과 피로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가슴으로만 얼싸 안을 수 있는 그런 이해와 공감.

“잠들지 않는 시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전해주는 것은, “잠만 잘 잔 나”였습니다. 시내는 결국 바다에 도착할 텐데 그래서 나는 지금 어디에 도착해 있나, 아마도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다는, 더불어숲이 되어 지키자, 는 것은 “잠들지 말자”, “잠시 눈 붙여, 내가 이따 깨워줄께”와 같은 것은 또 아닐지, 모두모임에서 엿보고 생각하고 고개 숙이고 또 쳐다본 일들은 결국 ‘왜 내가 혼자 살아서는 안 되는지’를 다시금 절실히 깨닫게 만들기.

잠들지 않습니다. 연평도 앞바다의 레이더는 잠들지 않습니다. 여의도 증권가와 뉴욕 월스트리트 전광판은 홍콩과 동경과 런던을 릴레이로 전지구를 휘휘 돌며 내내 잠들지 않습니다. 세상의 강고한 질서는 늘 그렇듯 결코 잠드는 법이 없지요. 이 구슬픈 세상에서 갸날픈 시내는 겨우겨우 흐릅니다. 마치 <숲>의 지난 십여 년이 그렇게 흘러왔듯이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자라지 않는 나무는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이 말씀에 기대어 <숲>에 관해, <숲>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생각해봅니다. 많은 이들의 진지한 얼굴들이 기억납니다. 저마다 삶의 자리가 버겁고 아프고 힘겹고 무거운데, 그런 각자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만만치 않은 분량을 덜어내, 그 밤, 그 자리에서 빙 둘러앉아 <숲>을 고민하고 <숲>에 관하여 자기 마음을 드러내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숲>이 잠들지 않는, 잠들 수 없게 하는, 그래서 자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나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고 그려봅니다.

새벽에 먼저 자리를 비우고 함께 온 친구와 함께 일어났습니다. 어느 분께도 인사 못 드리고 나와 착잡한 마음이었습니다. 친구가 순전히 가위바위보 게임만으로 받은 글씨를 차 안에서 활짝 펼쳐보았습니다.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다시, <숲>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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