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순 등불로 켜지는 어머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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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순 등불로 켜지는 어머님의 사랑
어머님께


불탄일(佛誕日)을 맞아 이곳의 불교신도들이 강당에 달 것이라며 등을 만들어왔습니다. 저는 등에 글씨와 연꽃을 넣으면서 스산한 강당에 이곳의 수인들이 이 등과 함께 어떠한 축원을 매달 것인가를 상상하다가, 문득 올해도 절을 찾아 등을 다실 어머님을 생각합니다.

 

행역숙야무매 상신전재 유래무기
行役夙夜無寐 上愼涅哉 猶來無棄

 

부디 몸조심하여 버림받지 말고 돌아오라는 {시경}의 척호장(陟岵章)을 암송해봅니다. 상고(上古)의 어머니로부터 오늘의 어머니의 가슴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유구하고 가없는 자모(慈母)의 사랑이 엽서를 적고 있는 저의 가슴에도 따순 등불로 켜집니다.
돌과 돌이 부딪쳐 불꽃이 튀듯이 나[我]라는 생각은 '나'와 '처지'가 부딪쳤을 때 공중에 떠오르는 생각이요, 한 점 불티에 지나지 않는 것. 그 불꽃이 어찌 돌의 것이겠는가, 어찌 돌 속에 불이 들었다 하겠는가고 싯달타는 가르칩니다.
'나'라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에 억눌려 무척 작아졌을 때 일어나는 불티 같은 순간의 생각이며 물에 이는 거품과 같은 것. 찰나이며 허공인 나를 버림으로써 대신 무한히 큰 나를 얻고, 더 큰 고통을 껴안음으로써 작은 아픔들을 벗는 진지(眞智)와 해탈은, 불꽃을 돌에 돌려주고 거품을 물에 돌려주고 빈비사라 왕의 마음을 백성들의 불행에 돌려주려는 싯다르타의 뜻과 한 뿌리의 열매입니다.
작은 고통들에 고달파하던 저와 마찬가지로, 아들을 옥 속에 넣고 가슴 저며하시던 어머님이 어느덧 아들과 함께 옥살이하는 아들의 친구들을 마음 아파하시고 이제는 우리 시대의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똑같이 마음 아파하시는 더 큰 사랑을 가지신 더 큰 어머님으로 성장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어머님의 마음이 바로, 이승에 살기에는 너무나 자비로웠던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올 초파일 힘드신 산길을 오르시어 손수 다시는 등에는 부디 숱한 아들들의 이름이 함께 담겨지길 바랍니다.
아버님께서 보내주신 돈 잘 받았습니다. 계수님께도 따로 편지하겠습니다. 한석봉 천자문은 지금 가진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버님께서 더 복사해서 보내시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화선지는 옥당지(玉唐紙)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오당지(吳唐紙)와 같은 값이면서도 질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내일이 초파일, 또 며칠 후면 어버이날입니다.
아버님 무리하시지 않도록 어머님께서 책이랑 다른 일들을 좀 막으시기 바랍니다.

 

 

1982.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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