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저서 『사명당실기』를 읽고 아버님께
10월 21일부 하서와 책 잘 받았습니다. 아직 완독하지 못하였습니다만 한자 한자에 배어 있는 아버님의 생각과 수택(手澤)을 읽어가노라면 어느덧 아버님과 한 이불 속에 누운 듯 아버님을 무척 가까이 느끼게 됩니다.
옛것을 온(溫)하고 그 위에 다시 새것을 더한 아버님의 문체는 그 내용과 혼연(混然)한 덩어리를 이루어 쉽고 여실(如實)한 이해를 돕기까지 합니다. 인쇄에 넘기기 전에 제가 한번 원고를 읽었으면 더러 고칠 곳도 있으려니 하였던 생각이 무척 외람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관적 견해가 억제되고 사료 중심의 객관적 시각이 시종 견지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필자의 주장이나 견해가 지나치게 배제됨으로써 장절(章節)의 결어(結語) 부분이 다소 산일(散逸)한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사실(史實)의 선택적 제시로써 그것을 대신하는 완곡한 배려는 훨씬 설득력 있는 주장임을 알겠습니다.
시대순에 따른 종적 접근을 '경'(經)으로 삼고, 사상, 인간, 시문, 교우 등 광범한 횡적 분석을 '위'(緯)로 삼아 엮어나가는 전개구조는 한 개인의 연구를 통하여 그 시대와 사회를 투영하는 매우 효과적인 구상이라 생각됩니다. 임진란의 상고(詳考)에 특별한 역점을 두심으로써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강하게 조명하고자 하신 아버님의 의도적 노력은, 대개의 역사연구가 빠지기 쉬운 현실도피 ― 과거 속으로의 도피 ― 를 튼튼히 막아주고 있습니다.
수집 정리하신 방대한 자료와 주석은 저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전문적인 것이어서 무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자료의 평가에 있어서 아버님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문자로서 남은 기록의 한계와 기록의 담당 계층 여하에 따른 자료의 자의성(恣意性)은 특히 주목되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수많은 시구의 번역에서는 물론이며, "달아나는 적을 쫓아 남으로 남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불러야 하는 사명대사" 등의 쉽게 풀어 쓴 절목문(節目文)에서도 아버님의 풍부한 시정(詩情)이 은근히 숨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책 읽다 말고 문득문득 책의 무게를 가늠해보며 아버님의 수고를 상상해봅니다. 부단히 발전하고 계시는 아버님의 삶의 자세는 걸핏 징역을 핑계삼는 저희들의 게으름을 엄하게 꾸짖습니다.
책표지에 눈길이 가면 거기 금박(金箔)을 입고 올라 있는 저의 글씨가 아무 공로 없이 그 자리에 앉은 자의 송구스러움 같은 것을 안겨줍니다.
끝으로 저는 아버님의 저서 어딘가에 스며 있을 어머님의 내조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책에 몰두하신 아버님의 곁에서 혼자 두량(斗量)하셔야 했던 그 긴 고독에 대해서도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1982.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