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계수님께
월급(?) 인상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내가 구입하는 물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과, 계란, 찐빵, 자장면, 책, 화선지, 메리야스, 바이진 안약, 프레마이신 연고, 세탁비누, 치약, 칫솔, 고추장, 마가린, 화장지, 세숫비누, 타월, 신발, 사탕, 미원…….
적고 나니 순서에도 약간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태공(太公)의 '육도'(六韜)에 동도장만물정(冬道藏萬物靜)이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겨울에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많습니다. 개구리, 파리, 너구리, 잠자리, 매미, 뱀, 곰…….
어찌 벌레와 짐승뿐이겠습니까. 더욱이 어찌 땅 속만 땅 속이겠습니까. 모든 달아나는 것들, 모든 눈감는 것들도 그 '곳'이 어디이든 한마디로 모두 땅 속입니다.
우리들의 생각, 우리들의 역사는 실은 겨울에 키 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갈 봄 여름의 역사(役事)가 한마디씩의 가지가 되어 키를 더하는 계절, 장(藏)이 로(露)를 키우고, 정(靜)이 동(動)을 키우는 계절이 본래의 겨울이라 생각합니다.
금년도 이젠 조금 남았습니다.
1982.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