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 닛타 지로 '자일파티(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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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1993-11-04
미디어 일빛

자일 파티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수많은 산을 오른다
도시코의 성공이 어떤 완성인 동시에 미완성이듯,
미사코의 죽음 역시 미완성인 동시에 삶의 완성이었다
- 신영복 -


대전교도소가 새 집을 지어 이사한 후 가장 기뻤던 일은 산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구속되고 난 후 16년만의 일이었다. 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구원이었다. 더구나 내가 든 감방은 3층이어서 구봉산(九峰山) 아홉 봉우리가 가슴에 와 안기는 것이었다. 우줄우줄 춤추며 달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도 산봉우리와 함께 달리고 있는 듯한 감격이 안겨 왔다.

나는 이 구봉산을 벗하며 두 해 겨울을 나고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는데, 두고 떠나야 하는 구봉산이 아까웠다. 전주시 평화동에 있는 전주교도소는 다행히 학산(鶴山)에 안겨 있어서 산이 손에 잡힐 듯 지척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륵의 모산(母山)이라 할 수 있는 모악산(母岳山)이 교도소의 전경(前景)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더구나 오른편으로 동학 농민전쟁의 격전지였던 완산칠봉(完山七峰) 일곱 봉우리를 모두 볼 수 있는 위치에 교도소가 있었다.

산은 삭막한 교도소의 잿빛 담벽을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

내가 닛타 지로의 '자일 파티' (원제 '銀嶺의 人'를 읽은 것은 구속된 이래 산을 보지 못했던 구 대전교도소에서였다. 책속의 산은 오르지도 바라보지도 못하는 산이었지만, 내게는 엄청난 세계를 열어주었다. 닛타 지로 특유의 문장과 사건의 전개는 한마디로 '등산' 자체였다. 잘 정돈된 호흡과 단 한 걸음도 건너뛰는 법이 없는 사실적이고도 깊이 있는 묘사를 통해서 차근차근 쌓아 가는 플롯의 진행은, 이윽고 그것이 도달한 높이와 무게의 장중함에 있어서 하나의 빛나는 산을 이룩해 놓는 것이었다.

나는 닛타 지로의 이처럼 담담하면서도 견고한 문장에 매료되어 그의 작품을 찾아서 읽었다. '알래스카 이야기' '다케다 신겐' '망향' 등 그의 소설에 일관되고 있는 성실한 자세에 감명 받았다. 그의 작가로서의 성실한 자세는 결국 그것이 소설적 허구이든, 역사적 사실이든, 현재적 관심이든 작가는 자기는 붓을 드는 대상에 헌사할 진지한 애정을 미리 길러 두지 않으면 안된다는 진리를 확인시켜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무엇보다 먼저 작품의 주제는 물론이고 그 배경, 그리고 하나하나의 개별적 상황에 대해서도 전문연구자들을 능가하는 조사, 연구에 의해 뒷받침됨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일 파티'는 아마 닛타 지로의 그러한 자세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전문 알피스트에 필적할 정도의 산력과 등반 경험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 소설을 집필하기 위하여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산들을 직접 등반하거나 답사하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인 도시코와 미사코, 그리고 사쿠마 히로시와 오하시 오사부로 역시 모두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일 뿐 아니라 그 성격도, 또 그들의 인생 역정도 사실과 같다는 것이 일본 평론가들의 지적이다. 다만 소설 속에서는 신혼여행을 겸한 산행에서 미사코가 낙뢰로 조난사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 그 무대는 드뤼이지만, 실제로는 마터호른의 이탈리아 능선에서 추락사하였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흔히 "왜 산에 오르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산을 오른다(Because it is there)"는 조지 말로리의 말로 닛타 지로가 자기의 산악소설을 설명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 속에는 산이 다만 산으로서만 제시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닛타 지로의 산은 무엇보다 먼저 그 사람과 더불어 그 존재를 드러내고, 그 아름다움과 장대함을 완성해 내고 있다. 그리하여 소설 속의 산은 다만 산으로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의 대상으로서, 또는 역사적 과제로서, 또는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깊은 함의로 읽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자아의 실현에 이르게 된다.

닛타 지로는 산을 사람과 관계시키되, 결코 고독한 한 사람의 등 반가와 관계시키지 않는다. 이 '자일 파티'에도 '검정 거미'로 불리는 검은 등산복의 외로운 등반가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고독하고 비정한, 심지어는 불길한 존재로 제시되어 다른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산을 어떤 총체적 의미로 파악하고 그것을 사람들의 집단과 관계시키고, 다시 그 사람들을 그들의 예술과 학문, 사랑과 우정, 그리고 유년시절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인간적 서정을 그 속에 담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놀라운 것은 이러한 함의가 단 한번도 문장의 표면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이 철저하리만큼 산악에 충실하고 등반에 충실한 사실적 필치를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위와 나무, 바람과 비, 천둥과 번개, 얼음과 눈과 같이 극히 자연적인 대상물들이 생생하게 살아서 다가온다.

예술 작품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도시코는 의사의 길을 걷는 의학도였고, 미사코는 가마쿠라보리라는 일본 전통공예에 정진하는 공예가로서, 그들은 산을 통하여 그들의 의지와 정서를 그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 내면화시켜 나간다. 이처럼 그들의 삶과 등반이 흔연히 융화되면서 학문으로 결실되고, 가마쿠라보리의 문양으로 승화되고 있다. 이러한 산과 사람의 승화과정이 시종 잔잔하면서도 깊이 있는 필치로 조명되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이 갖는 무게를 더해준다고 생각된다. "산이 산으로서 사람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닛타 지로의 산의 철학은 무심히 산을 오르는 우리들로 하여금 산을 새로운 눈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들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과연 산을 어떻게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통일시켜 낼 것인가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과제에 대한 난숙한 달관을 이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닛타 지로의 이러한 달관은 이윽고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의 의미까지도 깊은 통찰 속에서 되살려내고 있다.

미사코와 후미오의 최후는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그 순간 수정(水晶) 테라스와 그 주변의 암벽에 총총하게 자리잡은 수정군이 번개를 흡수하고 굴절시키고 반사하여 일제히 번쩍였다. 미사코는 이 세상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광채 속에서 포옹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았다..........그들은 마치 숙면을 취하는 것처럼 자일을 묶은 채 결코 깨어나지 않을 영원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천둥과 번개가 몽블랑 산군 전체를 온통 뒤덮는 드뤼 정상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수정들이 암벽에 박혀 있는 테라스에서, 거대한 빛의 폭발 속에서 그들은 숨져 갔다. 그리고 그랑드 조라스의 정상에 오른 도시코의 성공과 나란히 소설의 대미를 이룬다. 도시코의 성공이 어떤 완성인 동시에 미완성이듯, 미사코의 죽음 역시 미완성인 동시에 삶의 완성이었다.

이것이 닛타 지로의 산이고 산을 조망케하는 원근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수많은 산을 오른다. 그리고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완성과 미완성, 처음과 끝, 비탄과 환희 ......... 이 모든 것들의 의미를 아우를 수 있는 것이 '산'이며, 그것이 곧 산의 의미라고 생각된다. 산은 아무리 낮고 보잘 것 없는 토산(土山)일지라도 그것이 산인 한 거기에는 그것을 산이게끔 밑받침해 주는 암석이 박혀있고, 그것을 지켜 주는 수목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그것을 산으로 다듬어낸 물을 생각하게 한다.

이따금 찾는 북한산 등반 길에서 동행하던 도서출판 일빛의 이성우 대표와 이 소설을 번역한 주은경씨 그리고 일행들과 닛타 지로의 이 책을 이야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제 번역,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 '자일 파티'에 담겨있는 작가의 문학 뿐 아니라 막상 우리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넘고 만들어야 할 산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성찰하는 계기가 많은 독자들에게 공유되기를 바란다.


1993년 11월 4일 일빛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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