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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새벽의 기상 나팔
계수님께


기상 30분 전이 되면 나는 옆에서 곤히 잠든 친구를 깨워줍니다. 부드러운 손찌검으로 조용히 깨워줍니다. 그는 새벽마다 기상 나팔을 불러 나가는 교도소의 나팔수입니다.
옷, 양말, 모자 등을 챙겨서 갖춘 다음 한 손에는 '마우스피스'를 감싸쥐어 손바닥의 온기로 데우며 다른 손에는 나팔과, 기상 나팔 후부터 개방(開房) 나팔 때까지 서서 읽을 책 한 권 받쳐들고 방을 나갑니다. 몇 개의 외등(外燈)으로 군데군데 어둠이 탈색된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교회당 계단을 꺾어올라 높다란 2층 창 앞에 서서 나팔을 붑니다. 가슴에 맺힌 한숨 가누어서 별빛 얼어붙은 새벽 하늘에 뿜어냅니다. 성씨 다른 아버지께 엽서를 띄우는, 엄마 불쌍해서 돈 벌어야겠다는…… 농(農)돌이, 공(工)돌이, 이제는 스물다섯 징(懲)돌이……. 얼어붙은 새벽 하늘을 가르고, 고달픈 재소자들의 꿈을 찢고, 또 하루의 징역을 외치는 겨울 새벽의 기상 나팔은 '강철로 된 소리'입니다.
교도소의 문화가 침묵의 문화라면 교도소의 예술은 비극미(悲劇美)의 추구에 있습니다. 전장에서 쓰러진 병정이 그 주검을 말가죽에 싸듯이 상처난 청춘을 푸른 수의에 싸고 있는 이 끝동네 사람들은 예외 없이 비극의 임자들입니다.
검은 머리 잘라서 땅에 뿌리고, 우러러볼 청천 하늘 한 자락 없이, 오늘밤 두들겨볼 대문도 없이, 간 꺼내어 쪽박에 담고 밸 꺼내어 오지랖에 싸고, 이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이냐며 삶 그 전체를 질문하는, 검푸른 비극의 임자들입니다. 비극이, 더욱이 이처럼 엄청난 비극이 미적인 것으로 승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정직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한테 가해지는 중압을 아무에게도 전가하지 않고 고스란히 짐질 수밖에 없는,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의 '정직함'에 있습니다. 비극은 남의 것을 대신 체험할 수 없고 단지 자기 것밖에 체험할 수 없는 고독한 1인칭의 서술이라는 특질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특질이 그 극적 성격을 강화하는 한편 종내에는 새로운 '앎' ― '아름다움' ― 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비극은 우리들이 무심히 흘려버리고 있는 일상생활이 얼마나 치열한 갈등과 복잡한 얼개를 그 내부에 감추고 있는가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를 객석으로부터 무대의 뒤편 분장실로 인도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인식평면(認識平面)을 열어줍니다.
열락(悅樂)이 사람의 마음을 살찌게 하되 그 뒤에다 '모름다움'을 타버린 재로 남김에 비하여 슬픔은 채식(菜食)처럼 사람의 생각을 맑게 함으로써 그 복판에 '아름다움'[知]을 일으켜놓습니다. 야심성유휘(夜深星愈輝), 밤 깊을수록 광채를 더하는 별빛은 겨울 밤하늘의 '지성'이며, 상국설매(霜菊雪梅), 된서리 속의 황국(黃菊)도, 풍설(風雪) 속의 한매(寒梅)도 그 미의 본질은 다름아닌 비극성에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구태여 비극을 미화하고 비극미를 기리는 까닭은, 한갓되이 비극의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작은 사랑'(warm heart)에서가 아니라, 비극의 그 비정한 깊이를 자각케 함으로써 '새로운 앎'(cool head)을 터득하고자 한 오의(奧義)를 알 듯합니다.
그러나 기상 30분 전 곤히 잠든 친구를 깨울 적마다 나는 망설여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포근히 몸 담고 있는 꿈의 보금자리를 헐어버리고 참담한 징역의 현실로 끌어내는 나의 손길은 두번 세번 망설여집니다.
새해란 실상 면면한 세월의 똑같은 한 토막이라 하여 1월을 13월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 새로움이 완성된 형태로 우리 앞에 던져진다면 그것은 이미 새로움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모든 새로움은 그에 임하는 우리의 심기(心機)가 새롭고, 그 속에 새로운 것을 채워나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주어지는 새로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98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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