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다산(讀茶山) 유감(有感) 아버님께
유배지의 정다산(丁茶山)을 쓴 글을 읽었습니다. 이조를 통틀어 대부분의 유배자들이 배소(配所)에서 망경대(望京臺)나 연북정(戀北亭) 따위를 지어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연모를 표시했음에 비하여 다산은 그런 정자를 짓지도 않았거니와 조정이 다시 자기를 불러줄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해배(解配)만을 기다리는 삶의 피동성과 그 피동성이 결과하는 무서운 노쇠(老衰)를 일찍부터 경계하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농민의 참담한 현실을 자신의 삶으로 안아들이는 애정과 능동성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이조의 묵은 사변(思辨)에 신신(新新)한 목민(牧民)의 실학(實學)을 심을 수 있었다 하겠습니다.
다산의 이러한 애정과 의지는 1800년 그가 39세로 유배되던 때부터 1818년 57세의 고령으로 해배될 때까지의 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시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으며 마침내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500권의 저술을 비롯하여 실학의 근간을 이룬 사색의 온축(蘊蓄)을 이룩하였습니다. 물론, 다산학(茶山學)과 실학에 대해서는 일정한 한계와 편향이 없지 않음이 지적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이조 후기, 봉건적 지배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농민들이 그 거칠고 적나라한 저항의 모습을 역사의 무대에 드러내는 이른바 '민강(民强)의 시대'에, 봉건질서의 청산이 아닌 그것의 보정(補整) 개량이라는 구궤(舊軌)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하겠습니다. 목민심서의 '목'(牧) 자에 담긴 관학적(官學的) 인상(印象)과 '심'(心) 자에서 풍기는 그 관념성 역시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다산 개인의 한계로서가 아니라 다산이 살던 그 시대 자체의 역사적 미숙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더구나, 나아가 벼슬자리에 오르면 왕권주의자가 되고 물러나 강호(江湖)에 처하면 자연주의자가 되기 일쑤인 모든 봉건 지성의 시녀성과 기회주의를 둘 다 시원히 벗어 던지고, 갖가지의 수탈장치 밑에서 허덕이는 농민의 현실 속에 내려선 다산의 생애와 사상은 분명, 새 세기의 새로운 양식의 지성에 대한 값진 전범(典範)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산 선생의 유배생활을 아득히 더듬어보면서 실로 부러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가 거닐었던 고성암, 백련사, 구강포의 산천이며, 500여 권의 저술을 낳은 산방(山房)과 서재, 그리고 많은 지기(知己)와 제자들의 우의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산 선생의 유배생활을 부러워하는 것은 그만 못한 저의 징역 현실을 탓하려 함이 아니며 더구나 저의 무위(無爲)를 두호(斗護)하려 함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먼저 무엇을 겪는다는 것이며, 겪는다는 것은 어차피 '온몸'으로 떠맡는 것이고 보면 적성(積成)이 없다 하여 절절한 체험 그 자체를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정작 부러워하는 것은 객관적인 처지의 순역(順逆)이 아닙니다. 생사별리(生死別離) 등 갖가지 인간적 고초로 가득 찬 18년에 걸친 유형의 세월을 빛나는 창조의 공간으로 삼은 '비약'(飛躍)이 부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비약은 그 어감에서 느껴지는 화려함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는 '곱셈의 논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1983. 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