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1998-0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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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개마서원 |
산정에 배를 매고 노촌 이구영 선생님의 '산정에 배를 매고' 발문 나는 이 책의 원고를 읽고 참으로 깊은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노촌 이구영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나 뵌 곳이 바로 옥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속에 술회되고 있는 노촌 선생님의 이야기들은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낯설지 않다. 춥고 긴 겨울밤 옥방에서 간간이 들었던 이야기들이 많다. 자연 그 시절의 옥방에서 다시 선생님을 만나 뵙는 느낌이 든다.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그리워지는 시절이기도 하다. 잔잔한 목소리와 정확한 기억으로 정연하게 들려주시던 모습이 다시 회상된다. 생각하면 노촌 선생님과 한 방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행운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나는 대전교도소에서 노촌 이구영선생님과 한 감방에서 4년 넘게 함께 생활하였다. 당시 대전시 중촌동에 있었던 구 대전교도소 2사하 25방이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채 4평이 못되는 방에서 여러사람이 함께 지냈다. 이 책을 쓴 심지연교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 시절 함께 있었던 면면들이 다시 선연히 떠오른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리 오래지 않아 떠나갔다. 노촌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무기징역 형을 살고 있던 나는 1980년 노촌 선생님의 출소 때까지 함께 있었다. 가장 오래 같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노촌 선생님께서도 평생동안 가장 오래 한방에서 지낸 사람으로 나를 자주 이야기하시기도 하셨다. 그 파란 만장한 생애를 영위해 오시는 동안 가족들과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하루 24시간을 무릎 맞대고 지낸 4년은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 4년 속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와 사건이 담겨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에 노촌선생님으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었던 귀중한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놓진 아쉬움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나는 노촌선생님으로부터 과분한 애정을 받으며 그 엄혹한 세월을 견딜 수 있었음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비교적 젊은 나이로 징역살이를 하였던 우리들에 비하여 회갑을 그 속에서 맞으셨던 노촌선생님으로서는 우리가 돕기는커녕 미처 짐작하지도 못한 숱한 어려움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지금에야 그것을 느끼다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이 책의 출간에도 미력을 더하지 못한 송구스러움을 금할 길 없다. 뛰어난 학문적 진경을 보이고 있는 심지연교수가 어려운 작업을 맡아서 다행스럽기 그지없다. 사람의 일생이 정직한가 정직하지 않은가를 준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나는 그 사람의 일생에 그 시대가 얼마나 담겨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시대를 비켜간 일생을 정직하다고 할 수 없으며 하물며 시대를 역이용하여 자신을 높여 간 삶이야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 인생의 정직성은 그 사람의 인생에 담겨 있는 시대의 량(量)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촌 선생님의 삶은 참으로 정직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이를테면 조선봉건 사회, 일제하 식민지 사회, 전쟁, 북한 사회주의 사회, 20여년의 감옥 사회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를 두루 살아오신 분이다. 더구나 그 긴 세월의 가장 아픈 곳을 몸소 찾아가 동참한 삶이었다. 현대사의 가장 첨예한 모순의 현장에서 일구어 온 참으로 드물고 정직한 삶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노촌 선생님과의 생활을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까닭을 여기에 모두 술회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나자신을 여러 각도에서 깨닫게 한 시절이었다. 선생님의 삶이 보여주는 진솔함과 정직함은 무언의 교사임은 물론이다. 그 위에 지금도 선생님을 기억하고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선생님의 은은한 삶의 자세이다. 우선 다른 사람의 처지와 생각을 지극히 존중하는 자세이다. 비록 틀린 주장이라 하더라도 그 주장의 부분적인 타당성을 읽어 내고 그것을 인정하기에 조금도 인색함이 없다. 불가피하게 반대되는 견해를 밝히지 않을 수 없거나 그 주장의 허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도 언제나 맞춤한 때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개진하는 편이다. 맞춤한 때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논리적인 무리를 내심 자각하거나 자각하도록 유도한 연후에 그를 도우는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당신 당신 자신의 작은 실수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엄정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엄정함은 대체로 절제(節制)로 나타났다고 기억된다. 언어를 절제하고 주장을 절제하고 심지어는 아픔과 고령(高齡)까지를 절제함으로써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이 되는 것을 삼가고 스스로 아름다운 공간으로 남으려고 하셨다. 자신의 존재를 키우려 하는 우리들을 반성하게 하는 무서운 교훈이기도 하였다.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따뜻이 하고 자신을 갖기는 추상처럼 엄정히 한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의 생활철학이기도 하고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는 대중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촌 선생님의 이야기는 대체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노촌 선생님의 존재는 따뜻하기가 봄볕 같았다는 기억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연암은 선비(士)의 마음(心)이 곧 뜻(志)라고 하였으나 나는 노촌 선생님께서 범사에 속깊이 간직하고 계시는 뜻과 그 뜻을 풀어내는 유연함에서 선비의 그것을 넘어서고 있는 대중성과 예술성에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지금에 와서야 뒤늦게 깨닫는 일이지만 노촌 선생님의 잔잔하면서도 유장한 이야기 속에 절절히 배어 있는 사연들은 어느것 하나 당대의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중의 한가지를 예로 들자면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선생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 없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키는 등 해방정국의 부조리를 이보다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노촌 선생님을 비롯하여 근현대사를 핍진하게 겪어 오신 분들의 이야기는 역사를 과거의 사실로 치부하던 우리의 관념적인 사고를 반성케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책에서 술회하시는 노촌 선생님의 이야기도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과거의 화석같은 존재로부터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살아 있는 실체로 복원하고 생환하는 일이야말로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우는 자세일 것이다. 역사를 생환하고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그 시절을 정직하게 맞서서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질 때 비로소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노촌 선생님이 이 책으로 여러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 참으로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열어 저마다 역사를 생환하도록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노촌 선생님께서는 옥중에 계시는 동안 가전되어 오던 의병문헌을 들여와 번역을 하셨고 그 초고가 출소하신 후인 1993년 10월에 <湖西義兵事蹟>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노촌 선생님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외람되게도 책의 서문에 글을 실었다. 그 글의 일 절을 소개한다. "필자는 그 시절 노촌 선생님과 한 방에서 이 책의 번역일을 도왔다. 도와 드렸다기보다는 오히려 선생님의 과분하신 훈도와 애정을 입었음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노촌 선생님께서는 많은 분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심원한 한학의 온축과 확고한 사관의 토대 위에 굳건히 서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선비의 기개로 해방 전후의 격동을 온몸으로 겪어 오신 분이다.' 노촌 선생님은 내게 또한 서도의 정신을 일깨워 주신 분이다. 함께 서도반에서 글씨를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촌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은 글씨를 모른다고 겸양하시지만 나는 지금껏 많은 글씨를 보아 오면서도 항상 노촌 선생님의 글씨를 잊지 못하고 있다. 노촌 선생님의 글씨는 학문과 인격과 서예에 대한 높은 안목이 하나로 어우러져 이루어 내는 경지를 보여준다. 서권기(書券氣) 문자향(文字香)에 더하여 역사와 인간에 바치는 애정이 무르녹아 있다. 이는 분명 서예 이상의 것이다. 붓글씨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선생님으로 하여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 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내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선생님의 체취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 놓는 장소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 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지금도 물론 나의 가까이에 국어사전이 있고 자주 사전을 찾고 있다. 찾을 때면 290쪽을 열어 본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출간을 기뻐한다. 1998년 4월 신 영 복. "산정에 배를 매고"-개마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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