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가을에는 벼베기를 도우러 몇 차례의 바깥 나들이를 하였습니다. 교도소 논에 이틀, 대민지원(對民支援)으로 하루, 도합 사흘간의 가을일을 한 셈입니다. 오늘은 그때의 낙수(落穗) 몇 가지를 적어봅니다.
사회참관이나 외부작업을 하러 교도소의 육중한 철문을 나설 때 우리들이 습관적으로 갖는 심정은, 이것은 진짜 출소가 아니라는 다짐입니다. 혹시나 감상에 빠지기 쉬운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스스로 경계함인가 합니다.
철문 나서면 맨 먼저 구봉산(九峯山)이 성큼 다가와 가슴에 안깁니다. 산은 역시 가슴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감방에서 쇠창살 사이로 보는 것은 '엿보는 것'이었나 봅니다.
1킬로미터는 좋이 뻗은 교도소 진입로 양편에는 때마침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가 환히 길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 꽃길을 달려온 77번 버스에는, 화사한 코스모스로 인해 더욱 어두워진 표정의 재소자 가족들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젠 가족들보고 접견 오지 말라고 해야지.
아마 그들 속에 자기 가족을 세워본 누군가의 자탄(自嘆)이 우리들 모두의 가슴에 못이 됩니다.
옷 벗어부치고 울적한 마음도 벗어부치고, 드는 낫 한 자루씩 꼬나들고 논배미에 들어설 때의 대견함, 이것은 담 안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 지난 여름 우리가 모를 낸 논에 붙었는데, 김매기도 그렇고, 피사리도 그렇고, 벼이삭도 그렇고……, 곡식은 비료나 지력(地力)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일꾼 발자국소리 듣고 자란단 말이 적실합니다.
맨발로 논바닥에 들어서면 발가락 사이사이 흙이 솟아오릅니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흙힘입니다. 그러나 메뚜기 미꾸라지 죄다 떠나버리고 독한 농약에 찌들고 변색된 개구리 몇 마리 힘없이 달아날 뿐입니다. 헤식어 사위어가는 논입니다.
스무남은 명 중에 벼베기가 처음인 사람이 칠팔 명, 나도 그중의 하나이지만 미리 연습해두길 잘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도시의 뒷골목 사람쯤으로 여겼던 사람이 드는 솜씨를 보여줄 적에는 사회의 기반(基盤)으로서의 농촌의 광대함이 든든하게 느껴집니다만, 젊은 축일수록 낫질이 서투른 것을 보면 말로만 듣던 젊은이들의 이농(移農)과 그로 인한 농촌의 노화(老化)가 씁쓸히 실감됩니다.
똑같은 콩밥에 그 찬이지만 풀밭에 둘러앉아 먹는 맛이 또한 별미라 밥그릇이 대번에 비어버립니다. 점심 후에 짚단 베고 잠시 누웠다 눈뜨니 고추잠자리 가슴에 쉬고 갑니다. 실로 오랜만에 누워서 창틀에 잘려 각지지 않은 넓은 하늘 마음껏 바라보았습니다.
사흘째 대민지원으로 나간 곳은 멀지 않은 진잠들이었는데, 남의 논 아홉 마지기 부친다는 일흔넷의 가난한 할아버지의 논이었습니다. 논임자와 소출(所出)을 반타작하고 있는데, 농지세, 비료대, 농약값, 품값 전부 논 부치는 사람이 문다니 새참 국수 먹기도 민망할 정도로 어려운 살림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 논배미서 일하는데 점심밥 못 내와서 면목없어 하고, 국수 날라온 아주머님은 직원들이 안된다 해서 막걸리 한 잔 못 드려 면목없어 하고, 우리는 솜씨 없는 터수에 국수만 축내어 면목없어 하고……. 그러나 실로 오랜만에 받아본 한 사람씩의 일꾼 대접은 우리들이 그동안 잃어버린 채, 그리고 잊어버린 채 살아온 귀중한 것을 잠시나마 '회복'시켜주었다는 사실이, 올 가을에 거둔 커다란 수확의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2, 3일 논일로 벌써 고단하고 힘겨워지는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럽고 못나보였습니다만 나는 이번의 일로 해서, 남들은 나더러 일당 5천 원짜리 일꾼은 된다고 추어주지만, 당초 목표로 했듯이 가을들에서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훈련을 쌓은 것이 마음 흐뭇한 소득입니다.
비록 가을 들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는 삶의 어느 터전에 처한다 하더라도 자기 몫의 일에 대하여, 이웃의 힘겨운 일들에 대하여 결코 무력하거나 무심하지 않도록 자신의 역량과 심정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징역살이라 하여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여름 내내 청산을 이루어 녹색을 함께 해오던 나무들도 가을이 되고 서리내리자 각기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단풍드는 나무, 낙엽지는 나무, 끝까지 녹색을 고집하는 나무…….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 바람이 눕는 풀과 곧추 선 풀을 나누듯, 가을도 그가 거느린 추상(秋霜)으로 해서 나무를 나누는 결산(決算)의 계절입니다.
계수님과 두용이의 접견 매우 반가웠습니다.
1984.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