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 열여덟번째의 세모에 부모님께
아버님의 하서와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아버님의 저서도 쉬이 출판되어 우송되어 올 때가 기다려집니다.
이곳 교도소 주위를 병풍 두르고 있는 뒷산에는 첫눈 때부터 지금껏 눈이 하얗습니다. 산설(山雪)은 녹지 않고 어는가 봅니다.
무심히 창 밖을 내다보면 거기 하얗게 쌓여 있는 눈은 언제나 우리의 시선을 서늘하고 냉정하게 만들어줍니다.
눈은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를 너그러이 덮어주는 듯하면서도 반면에 드러내야 할 것은 더욱 뚜렷이 드러냅니다. 눈은 그 차가움만큼이나 냉엄합니다.
옥중에서 맞이하는 열여덟번째의 세모입니다. 세모는 제게 있어서 흡사 푸짐한 강설(降雪) 같습니다. 연간백사(年間百事)를 너그러이 덮어주는가 하면, 무섭도록 뚜렷이 드러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세모가 되면 저는 상심하실 어머님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궂은 날은 나막신 장사하는 아들을 생각하고 갠 날은 짚신 장사하는 아들을 생각키로 하여 근심을 달래던 옛날 어머님의 고사(故事)처럼 아무쪼록 스스로 심기를 유장(悠長)하게 가꾸어 조섭하시길 바랍니다.
새해에는 아버님, 어머님을 비롯하여 온 가족이 모두 강건하시길 빌며 세배에 대(代)합니다.
1985년 세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