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환경, 새로운 만남 아버님께
비록 새로운 환경이긴 합니다만 어려운 일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낯선 환경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것이란 점에서 사소한 생활의 불편 그 자체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기쁨입니다. 익숙한 환경과 친분 있는 사람들의 양해 속에서는 미처 발견되지 못하던 자신의 작풍상(作風上)의 결함이 흡사 백지 위의 묵흔(墨痕)처럼 선연히 드러납니다. 저는 이러한 발견이 지금껏 무의식중에 굳어져온 안이한 습관의 갑각(甲殼)을 깨뜨리고 좀더 너른 터전 위에 저의 자세를 다시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님의 하서는 언제나 저의 무위(無爲)를 무언(無言)으로 꾸짖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한결같으신 연학(硏學) 역시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출간하신 책 2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번 형님 다녀가시면서 차입해주신 푸짐한 접견물은 마침 함께 이송와서 서먹서먹해 하던 많은 사람들을 흐뭇하게 해주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이곳까지 먼 걸음하시지 마시고 날씨 훨씬 풀린 다음 가족 좌담회 때쯤 충분한 시간을 갖고 뵙는 편이 좋겠다 생각됩니다.
1986.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