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설도 비에 녹아 사라지고 형수님께
가족좌담회 이달에 넣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이달 하순께 날짜 정해서 교무과의 별도 통고가 있겠습니다만 바쁘신 형님 두 번 걸음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바람도 봄, 햇볕도 봄. 봄이 가장 더딘 교도소에도 봄기운 완연합니다.
털스웨터 벗어서 세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어느 편이냐 하면 계속 껴입고 있는 축입니다. 겨울은 순순히 물러가는 법이 없이 한두 번은 반드시 되돌아와서는 해코지하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이달 중으로 서화반 거실 작업이 허가됩니다. 금년 가을까지 거실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동안의 공장생활은, 3개월 여의 짧은 기간이었습니다만, 그것은 제게 부딪혀온 많은 동료들의 체온이 저의 가슴을 생생하게 살려놓은 뿌듯한 것이었습니다.
"이 석두야. 보겟또구찌(pocket+口)가 5인치 반이믄 손이 들어가겠어? 이 사람 고시[腰]가 42라구!"
"형님도 참말로 모르는고만. 일 않고 노는 사람 손 크간디요? 덩치만 오살나게 커갖고 손 ×만한 사람 을매든지 있다구요."
명욱이 누이동생한테서 온 편지 한 구절.
"……오빠,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 엄마한테는 돈 2만 원 받았다고 답장해줘. 꼭 부탁이야. 다음에 꼭 갚아주께. 미안해……."
"목공장에서 고양이 잡아묵었대. 징그런 놈들, 세면대야에다 볶았는데 양도 솔찮고, 맛도 괜찮은 개비여."
"상일이 손가락에 지남철 붙는 것 보고 요술인 줄 알았지. 철공장 댕길 때 파편 박혀 있는 줄 모르고."
점검! 3조 가위 가져간 사람! 사약(私藥) 신청! 배식 준비!
보안계장 순시! 난롯가 신발 임자! 운동 준비! 불교 성가대 교회!
오늘 하루 동안만도 숱한 사람들의 별의별 목소리와 갖가지 일들로 공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사업'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최고의 교실이라 생각됩니다.
모악산의 잔설(殘雪)도 비에 녹아 사라지고, 이제 그 넉넉한 팔을 벌려 다가오는 봄을 맞으려 하고 있습니다.
1987.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