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비행기에서 조감(鳥瞰)하는 태백산맥은 산밑에서 올려다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높이와 부피가 사라지면서 펼쳐보이는 그 넓이와 길이의 유장(悠長)함에 놀라게 됩니다. 수많은 산맥들이 팔을 뻗어 대지를 감싸고 있는가 하면 어느새 골짜기마다 흰 안개를 불러들여 사람들의 마을을 솜이불로 덮어주고 있습니다.
나는 안개 사이로 언듯 언듯 드러나는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저 마을 속에서 영위되고 있는 우리의 삶과 그 삶속의 희노애락을 생각하였습니다.
음력 4월 보름 대관령 국사서낭제를 시작으로 하는 강릉단오제는 한마디로 유장한 산맥에 안기어 살아온 우리의 삶을 조감케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낭제는 대관령의 서낭신을 영접하여 강릉의 여서낭당에 합배(合配)하는 제의입니다.
서낭신이 호랑이를 심부름꾼으로 보내어 강릉의 정씨처녀를 아내로 삼은 날이 4월 보름입니다. 서낭당은 대관령에서 산으로 1km쯤 올라간 곳에 산신당과 이웃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호랑이에게 업혀간 처녀가 발이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서낭신을 모시러 가는 서낭제행렬은 참으로 장관이었다고 합니다.
나팔과 태평소, 북ㆍ장고를 멘 악대가 무악을 울리며 앞장서면 호장(戶長)ㆍ수노(首奴)ㆍ도사령(都使令), 남녀무격(巫覡) 수십명이 말을 타고 줄을 잇고 다시 그 뒤로 수백명의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지고 대관령고개를 걸어 올라갔다고 합니다.
서낭제의 가장 상징적 의례는 부정굿과 서낭굿에 이어 신목(神木)을 베는 대목이었습니다. 신목은 서낭신의 신체일뿐만 아니라 나무는 옛날부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통로였습니다. 신의 뜻이 인간에게 내려지고 인간의 뜻이 신에게 전해지는 우주수(cosmo-tree)로서 단군사화에 나타나 있는 신단수(神壇樹)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장부(神丈夫)가 산으로 올라가 잡은 나무가 강신을 비는 축원과 함께 떨리기 시작하면 평범한 단풍나무는 돌연 신목이 되고 일제히 무격들이 제금을 울리는 가운데 베어지고 사람들은 다투어 청홍색 예단을 신목에 걸어 소원성취를 빕니다.
이 신목과 위폐를 여서낭당으로 옮겨 합배한 가운데 마치 성화를 밝혀놓고 진행하는 제전처럼 20여일에 걸친 단오제가 진행됩니다. 동예(東濊)의 무천(舞天)이 가을의 추수감사제였음에 비하여 강릉단오제는 풍농과 풍어 그리고 마을의 수호를 비는 봄의 기원제입니다.
나는 하루 종일 서낭제와 위패행렬을 뒤따라오면서 이 축제가 융합해내는 거대한 화합의 정신에 깊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풍농ㆍ풍어의 기원을 넘어서 남(儒)과 여(巫), 민과 관, 양반과 평민이 한데 어울리는 공동의 축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신제ㆍ서낭제 영신행렬 그리고 봉안제등 모든 절차의 앞쪽을 언제나 홀기(笏記)를 부르고 헌작(獻爵), 독축(讀祝)을 하는 엄숙한 유교적 제의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광경에 불만을 표하는 나에게 당신은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화해이고 조화라고 하였습니다.
혈연을 중시하는 지배층의 문화가 이러한 공간공동체 축제에 합류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과 정묘ㆍ병자 양란 이후 봉건적 질서가 급격하게 동요되던 시기에 자연촌 단위의 자위조직을 수렴하여 통치구조를 재창출하려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떨쳐버리기 어렵지만 당신의 말처럼 조화(調和)야 말로 우리의 민족적 정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존과 조화가 곧 민중의 지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調)는 글자그대로 말씀(言)을 두루(周) 아우르는 민주적 원리이며 화(和)는 쌀(禾)을 나누어 먹는(口) 밥상공동체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신은 단군조선이 거수국(渠帥國)이라는 자립적인 부족국가간의 화합에 기초를 둔 나라였기 때문에 2,300년이라는 장구한 역사가 가능하였던 점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는 삼국시대이후 외래종교가 지배계급의 통치사상으로 자리잡음에 따라 민간신앙으로 밀려나고 더욱이 일제치하에서는 공동체의식을 강조하는 마을굿이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아 미신이 됩니다. 특히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공간공동체 자체가 와해됨으로써 그 기반이 상실되고 더구나 구조화된 경쟁원리와 개인주의로 말미암아 이러한 전통은 이제 청동도끼와 나란히 박물관에 진열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강릉단오제는 사람과 산천을 융화하고 산사람과 죽은 사람을 화해시키고, 성(聖)과 속(俗), 상(上)과 하(下)를 아우르는 우리문화의 원형을 드러내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남대천 백사장에서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갖가지 단오제행사와 난장은 ‘굿’으로서의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풀림(놀이)과 조임(祭儀)을 적절히 배합하며 일상적 규범과 갈등으로부터 생활전부를 송두리째 일탈시키는 거대한 해방공간을 마련함으로써 개인과 마을을 동시에 정화(淨化)하는 공동의 축제가 됩니다.
각박한 도시의 그늘에서 매일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서 키워온 경계심을 풀고 가설(架設)의 공간에서 ‘차별의 의상’을 벗게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릉단오제는 삶의 공간 그 자체를 잃고 항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know where)에 쫓기고 있는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회복해야하 할 것이 무엇인가를 돌이켜보게 합니다.
타인과의 관계를 최소화함으로써 단지 갈등을 회피하려고만 할 뿐 관계 그 자체의 건설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으려는 ‘시민의식’의 왜소한 실상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커뮤니케이션의 차원으로 격하되고 커뮤니케이션은 다시 미디어의 문제로 귀착되는 ‘동굴(洞窟)의 이성(理性)’을 반성하게 합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태백산맥은 이미 어둠에 묻혀 그 자취를 더듬을 길이 없어졌지만 강릉부사의 영지보다 더욱 너른 땅을 다스리고 있는 대관령서낭신은 어쩌면 그 긴 팔을 뻗어 우리의 삶을 안아주는 태백산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